어느 소아암 병동. 밤 10시가 넘은 시간. 복도 한쪽 끝에서 울려 퍼지는 느닷없는 각설이타령. 꽹과리를 대신해 밥그릇을 하염없이 두드리며 구성지게 타령을 읊조리는 장본인은 50대 초반으로 보이는 여인. T.P.O. 그러니까 시간, 장소, 경우, 그 어떤 것도 상식적으로 맞지 않는 이런 상황 앞에서 많은 사람이 그만 황당해하거나 당황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 타령조가 너무 기가 막혀 그 누구도 쉽사리 막을 수조차 없었다는 것.
결혼 후 오랫동안 아이를 갖지 못하다가 뒤늦게 은총처럼 아이를 얻었다. 금이야 옥이야 애지중지 키웠다. 무럭무럭 자라 유치원을 마치고 초등학교에 입학했는데 갑작스럽게 청천 날벼락이 떨어졌다. 소아암 판정을 받은 것이다. 이것은 아니다, 그럴 수는 없다, 이건 하느님의 정당한 뜻일 수 없다, 당신은 그저 졸고만 있는 것이냐, 외쳐보기도 하고 사정해보기도 했지만, 어쩔 수 없는 현실이었다.
무엇보다 어미로서 힘들었던 것은 자식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대신해 줄 수 없다는 것. 더욱더 힘들어하는 아들의 육체적 고통을 나누어 가지기 힘들다는 것. 어머니의 간병사로부터 전해들은 이야기다.
부모 자식 사이, 부부 사이, 연인 사이, 또 그 어떤 가까운 사이라도 신체적 독자성 앞에서는 어쩔 수 없다. 아무리 애틋한 부모라도 자식 대신 아파줄 수 없고, 제아무리 극진한 효자라도 부모 대신 신체적 고통을 감당할 수 없는 것이다.
가모(家母)께서 병석에 누우신 지 10년이 넘었다. 그동안 어머니는 매일매일 조금씩 작아지셨다. 당신에게 다가오는 고통의 크기만큼 당신 몸을 내어주시나 보다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그 누구였던가. 고통은 나눌수록 줄어들고 기쁨은 나눌수록 커진다고 말한 사람은? 지난 10년 동안 나는 그 말 때문에 많이 절망했다. 단 한 번도 제대로 어머니의 고통을 덜어드리지 못했다는 자책감 때문이다. 가모께 엄청난 빚을 진 자식으로서 그분의 통증의 일부라도 내 몸으로 옮겨올 수 없었기에 무척 고통스러웠다.
말씀도 못하시고 간헐적으로 신음만을 토해내시는 어머니를 뵐 때마다 가슴 깊은 곳에서 찌르는 아픔을 감내하지 않을 수 없다. ‘위대한 고통’과 맞씨름하시는 그분이 너무나도 안쓰럽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해드릴 수 없다는 왜소한 죄책감 때문이다. 내가 태어났을 때 당신도 나를 지극히 가엾게 바라보셨을 것이다. 박경리의 <토지>에서 최서희의 남편 길상은 이렇게 말했다. “연민은 순수한 애정의 출발일 게다. 젖을 물리는 어머니의 마음도 연민일 것이다.”
그러고 보면 이 연민도 어머니에게 진 빚의 일환이 아닐까 싶다. 나를 낳아 기르시는 내내 연민 어린 시선으로 나를 지켜주셨던 그 눈빛으로 진 빚을 감당할 수 없다. 턱없이 부족하다. 몸으로도 고통을 나눌 수 없고 눈빛으로도 어머니의 깊고 넓은 마음을 돌려드릴 수 없으니, 나는 영락없는 불효자인 셈이다.
지난 주말 어버이날을 앞두고 크고 작은 음식점들이 붐볐고, 전국의 도로들이 분주했다. TV로 그들의 풍경을 바라보며 공연한 시샘을 했다.
계절 중의 으뜸인 5월, 가정의 달이다. 행복한 가정에 더욱 아름다운 행운이 깃들기를 빈다. 더불어 병원에 사랑하는 가족을 두고 연민의 시선으로 고통받는 이들에게는 공감과 연대의 정을 보낸다. 비슷한 처지의 고통을 앓고 있는 이들의 정서적 연대를 제안한다. 그 연대를 통해, 그럼에도 인생은 아름답다는 역설을 나누고 싶다.
글·우찬제(서강대 국문과 교수·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