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30년(세종 12) 세종은 ‘공법(貢法)’이라는 새로운 세법 시안을 두고 백성들에게 찬반 의사를 묻는 국민투표를 실시했다. 토지 1결당 일정하게 10두의 세금을 정하는 것이 핵심 내용이었다. 이전까지 관리가 직접 논밭을 돌아보면서 농사의 수확량을 확인하고, 그에 따라 세금을 정하는 방식인 답험손실법(踏驗損失法)을 따르다 보니 관리들의 주관적인 판단에 의해 세금이 들쑥날쑥 매겨지고 백성들은 그 피해를 고스란히 떠안았다.
1427년(세종 9) 3월 세종은 인정전(仁政殿)에 나아가서 문과(文科) 시험의 책문(策問)에서 “예부터 제왕(帝王)이 정치를 함에는 반드시 일대(一代)의 제도를 마련하는 것이니, 방책(方冊)에 살펴보면 이를 알 수 있다. …삼대(三代)의 법을 오늘날에도 시행할 수 있겠는가. …백성을 사랑하는 시초란 오직 백성에게 취하는 제도가 있을 뿐이다. 지금에 와서 백성에게 취하는 것은 전제(田制)와 공부(貢賦)만큼 중한 것이 없다”면서 세금 문제의 중요성을 부각시켰다. 세종은 여러 신하들의 자문을 구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백성들에게 의견을 물어보기로 결정했다. 역사상 최대 규모의 국민투표는 그렇게 시행됐다.
노비·여성 제외한 모든 백성에게 찬반 물어 확정
세종의 지시에 따라 1430년 3월 5일부터 8월 10일까지 무려 5개월간 전국에 걸쳐 국민투표가 실시됐다. <세종실록>에는 “정부·육조와 각 관사와 서울 안의 전함(前銜) 각 품관과 각도의 감사·수령 및 품관으로부터 여염(閭閻)의 세민(細民)에 이르기까지 모두 가부(可否)를 물어서 아뢰게 하라”고 기록돼 있다.
1430년 호조에서는 국민투표 결과를 보고했다. 17만여 백성이 투표에 참여하여 9만8,000여 명이 찬성, 7만4,000여 명이 반대한 것으로 집계됐다. 당시 인구수를 고려하면 17만여 명의 참여는 노비나 여성을 제외한 거의 모든 백성을 대상으로 한 것으로, 오늘날의 국민투표와 흡사한 성격을 띠었다고 할 수 있다.
<세종실록>은 각 도별 찬반 상황 외에도 찬성과 반대의 이유도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국민투표 이후에는 세법의 보완 조치에 들어갔고, 1437년(세종 19) 8월 전라도와 경상도 지역의 공법 시범실시에 이어서 1441년(세종 23)에는 충청도까지 확대됐다.
1444년(세종 26) 공법은 마침내 연분 9등법과 전분 6등법으로 최종 확정됐다. 그리고 1결당 20두에서 4두에 이르는 차등 세금이 적용됐다. 연분 9등법과 전분 6등법은 토지의 비옥도를 6등급으로 나누고 해에 따라 풍흉을 ‘상상(上上)’에서 ‘하하(下下)’의 9등급으로 나누는 제도다.
국민투표를 실시한 지 14년 만에 토지의 세법에 대한 공정한 잣대가 마련됐고, 이는 이후 조선 사회의 기준 세법이 되었다. 세종은 이 밖에도 백성들의 부담을 적게 하면서도 국가의 재정 수입을 안정적으로 확보하기 위해 농법의 개선에도 힘을 쏟았다. 그 결실은 촌로들의 농사 경험을 바탕으로 쓴 <농사직설>로도 나타났고 농업의 효율성을 늘리는 과학기기들의 발명으로 이어졌다.
흔히들 왕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선입견을 가지고 있는 전제왕권의 시대에 이처럼 민주적인 의사결정 과정을 거쳤다는 사실이 놀랍다. 세종이 주도한 583년 전의 국민투표. 이는 과연 세계사에서도 돋보일 만한 민주적인 정책이었다. 세종의 적극적인 의지와 이에 화답한 관리와 백성들의 모습이 세종시대를 더욱 자랑스럽게 기억하게 한다.
글·신병주(건국대학교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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