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난히 길고 추웠던 겨울이 엊그제 같은데 봄마저 막바지로 치닫고 있다. 온 산은 꽃이 피어 거대한 꽃다발을 이룬다. 나무에 난 새순은 어느새 짙은 잎사귀로 샛파랗게 여물었다.
옛 선비들은 곧잘 이런 나무나 꽃에 자신들이 가져야 할 덕목을 덧씌우곤 하였다. 말하자면 식물의 생태에 자신들의 감정을 이입하여 귀하게 여겼던 것이다. 겨울이 채 가시기도 전에 꽃향기를 발산하는 매화와 사절기 변함없이 단아한 모습의 난초와 찬 서리가 내려야 비로소 진한 꽃망울을 터뜨리는 국화와 한겨울에도 변함없이 꼿꼿하게 푸른 대나무에서 그들의 모습이 어른거리지 않는가. 어디 그뿐이랴, 나무 한 그루에 만가지 기개와 지조를 압축하여 표현하니, 이른바 풍설한파 아랑곳하지 않고 바위 절벽에 우뚝 선 낙락장송이다. 고산준령은 없지만 추사의 <세한도>에도 그런 의도가 담겨 있지 않던가.
나는 과실나무들의 한해살이를 보며 종종 사람의 성장 과정을 연상하곤 한다. 가장 일찍 꽃이 핀 매화열매가 제일 먼저 익는다. 그 다음 살구가 익고, 버찌가 사방에 떨어질 때쯤 복숭아도 익는다. 늦게 움튼 포도와 감은 여름이 다 가도록 설익거나 푸르고, 가장 늦은 대추는 한가위가 한참 지나도록 약간 붉은색을 띨 뿐이다. 그래도 가장 늦게까지 나무에 달려 있는 것은 감이다.
과수도 이럴진대 하물며 사람이야 어떨까. 같은 과수라도 조생종이 있고 중생종과 만생종이 있듯이, 같은 나이에 학업을 시작하고 동일한 교육 과정을 거쳐 성장하더라도 인격이 완성되어 능력을 십분 발휘하기까지는 사람마다 제각각이다. 이치가 이런데도 우리의 가정 교육은 어떠하며, 학교 교육은 또 어떤 방향으로 가고 있는가.
머리가 늦게 깨어 더디게 성장하거나 조금 늦게 철들 자식들에게 우리 부모들이 보여주는 불만과 불안은 행여 대기만성할 싹을 미리 자르는 행위가 되지는 않을는지, 조숙한 아이들과 비교되며 학원과 과외로 내몰리는 자식을 그르쳐 저 나름의 결실을 맺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해보았는지, 경쟁에 내몰리는 아이들이 제 세상을 지탱해줄 굳건한 밑동을 키우기도 전에 시들까 걱정스럽다. 나무가 그렇듯이 모차르트 같은 조숙한 천재도 있고, 베토벤처럼 세월과 더불어 원숙해지는 인물도 있다. 또 세상에는 랭보처럼 20대 초반에 이미 시를 다 쓰고 세상 오지를 떠돌다간 천재시인이 있는가 하면, 환갑이 넘도록 즐겁게 시를 쓰며 무명의 시인으로 살아가는 촌부도 있다.
누구도 그의 천재성을 의심하지 않는 위인을 예로 들어보자. 아인슈타인이 어릴 때 천재였던가? 열다섯 살 때 학우들을 방해만 한다고 학교에서 쫓겨나기도 했고, 대학은 낙방하고 재수 끝에 입학했다. 대학을 졸업하고는 직업을 못 구해 전전하다 친구의 도움으로 겨우 특허국 말단 공무원이 된다. 그때까지 그는 한번도 천재성을 발휘한 적 없는 평범한 젊은이에 불과했다. 그가 천재였다는 사실만 우리에게 중요하지, 그가 그저 보통의 교육 과정을 거친 것에는 별로 관심을 두지 않는다.
한 그루 살구나무란 이른 봄 꽃에서부터 초여름 무성한 잎과 그 잎 사이로 얼굴 내민 노란 열매와 스산한 가을의 바랜 잎들과 겨울 내내 굴곡진 둥치까지, 한 해를 통틀어 변화하는 모습 전체를 말한다. 그 어느 것도 아름답지 않은 모습이 없듯이 그 어느 나무도 저마다 아름답지 않은 순간이 없다.
봄 같지 않은 봄이 어느새 잦아들고 있다. 바야흐로 남쪽에는 여름이 다가서고 있다. 꽃다발 산등성이도 짙은 신록을 준비 중이다. 자연의 섭리는 그야말로 제각각 잎 나고 꽃 피고 열매 맺는 시기를 달리하며 반복된다. 그러고 보니 사시사철 결실 없이 잎만 무성한 나무들도 있다.
글·전광호(부산대 불어불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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