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후기를 대표하는 국왕 정조(正祖 : 1752~1800)는 1791년 신해통공(辛亥通共)을 단행하여 시전(市廛) 상인의 금난전권(禁亂廛權)을 폐지하는 개혁 정책을 단행했다. ‘금난전권’이란 난전을 금지하는 권리로, 시전 상인이 자신의 기득권을 고수하기 위해 새로운 상인의 장사를 허가하지 않게 하는 조처였다. 특히 시전 상인들은 정치권력과 결탁하여 계속해서 상업의 이익을 독점하고 있었다. 조선후기에는 상업 분야에서 특히 변화가 두드러졌다. 17세기 이래 농업 생산력이 증대되고 수공업 생산이 활발해지면서 상품의 유통이 활성화되었다.
세금을 쌀과 포로 납부하게 한 정책이나 17세기 후반 상평통보의 전국적인 유통은 상품 화폐 경제의 발달을 촉진시켰으며, 농촌에서 도시로 인구가 유입됨에 따라 상업 활동이 활발해졌다. 17세기 이후 대동법이 시행되면서 탄생한 공인(貢人)의 성장 또한 상업 활동을 가속화시켰다. 조선후기는 사상(私商)들의 성장이 특히 두드러진 시대로서 이들은 서울은 물론이고 전국 각지에서 활발한 활동을 폈다. 사상들은 인구가 밀집한 서울을 거점으로 삼으려 했지만, 이곳은 이미 권력의 지원을 받는 시전 상인들이 ‘금난전권’의 비호하에 있었다. 금난전권은 새로운 상업 세력으로 성장한 사상들에게는 최대의 장벽이었던 셈이다.
조선후기 상업의 성장과 시장의 발달이라는 사회 변화를 주시하고 있던 정조는 1791년 1월 신해통공을 단행하여 육의전을 제외한 시전의 금난전권을 혁파하도록 하였다. 1791년이 신해년이고, 통공이란 ‘양쪽을 모두 통하게 한다’는 뜻이어서 신해통공이라 한다.
정조에게 통공의 필요성을 적극 건의한 인물은 좌의정 채제공(蔡濟恭 : 1720~1799)이었다. 채제공은 정조가 노론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등용한 남인(南人)의 중심인물로, 정치권력과 결탁되어 있지 않았기에 시전 상인의 정경유착의 고리를 끊어나갈 수 있었다.
채제공은 “도성에 사는 백성의 고통으로 말한다면 도고(都賈:도매장사)가 가장 심합니다. 우리나라의 난전(亂廛)을 금하는 법은 오로지 육전(六廛)이 위로 국역(國役)을 응하게 하고 그들로 하여금 이익을 독차지하게 하자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즈음 빈둥거리며 노는 무뢰배들이 삼삼오오 떼를 지어 스스로 가게 이름을 붙여놓고 사람들의 일용품에 관계되는 것들을 제각기 멋대로 전부 주관을 합니다. 근래에 이르러서는 심지어 채소나 옹기까지도 가게 이름이 있어서 사사로이 서로 물건을 팔고 살 수가 없으므로 백성들이 음식을 만들 때 소금이 없거나 곤궁한 선비가 조상의 제사를 지내지 못하는 일까지 자주 있습니다”라고 말하며 시전 상인들의 독과점이 지니는 폐단을 강하게 지적하였다.
특히 “사람들의 일용품에 관계되는 것들을 제각기 멋대로 전부 주관을 한다”는 지적은, 최근 동네 가게나 빵집이나 서점, 문방구에 이르기까지 모든 부분에서 대기업이 문어발식으로 진출하는 상황과도 유사하다. 신해통공의 시행은 상당한 효과를 거두었음이 실록의 기록에서 확인된다. “어물 등의 물가가 갑자기 전보다 싸졌으니 개혁에 실효가 있습니다”라는 보고나, “장작 값이 옛날의 수준으로 돌아갔다”는 보고 등이 이어졌다.
신해통공은 규장각의 설치와 화성 건설로 대표되는 정조의 개혁정치가 사회·경제 분야에서 구체적으로 구현된 사례로 볼 수 있다. 신해통공으로 금난전권이 폐지됨에 따라 그동안 기득권을 누리면서 큰 혜택을 입었던 권세가와 시전 상인들은 큰 손실을 입었지만, 조선후기 새롭게 성장하고 있던 소생산자나 영세 상인이 발달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 다수를 위한 정책이 행해져야 한다는 신념하에 신해통공을 단행한 정조와 채제공으로 인하여 조선후기 상인들은 새로운 희망의 빛을 볼 수 있었다.
글·신병주(건국대학교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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