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둘레길은 편안하게 걸을 수 있는 길이다. 열렬히 지리산을 품고 싶으나 망설이는 자들의 소망을 쉽게 들어준다. 안간힘을 써가며 오르고 내리는 등산길, 산으로 향한 길이 아니라 산을 끼고 그 주변을 넉넉하게 감싸 안는 길이다. 비교적 가볍게 걸을 수 있는 길, 솔숲의 향기를 마실 수 있는 길, 옛 정취와 역사를 만날 수 있는 길이다.
전라북도·전라남도·경상남도의 3개도, 남원시·함양군·산청군·하동군·구례군의 5개 시·군, 그리고 21개 읍·면의 120여 마을을 잇는 274킬로미터의 도보길인 지리산둘레길은 2008년에 그 첫 구간이 문을 연 이래 지속적인 정비사업을 거쳐 2012년 5월 마침내 환형으로 된 전체 구간이 이어졌다. 지리산을 중심으로 여러 지역이 경계를 두지 않고 어우러진다.
다양한 지역을 아우를 뿐 아니라 길의 형태도 다채롭다. 옛길과 숲길은 물론이고 마을길과 논둑길·강변길·고갯길 등을 이으며 걷는 맛을 제대로 느끼게 한다. 길에서 만나는 자연과 마을, 역사와 문화의 의미를 다시 찾아내 잇고 보듬는 길이다. 지리산을 아우르며 흐르는 강·들·마을·사람 향기를 마음껏 느끼며 걸어볼 수 있다.
하동 삼화실~대축 구간서 오지 산촌 체험
제아무리 유명세를 탄 지리산둘레길이라도, 거기에 날씨마저 화창한 연휴라 할지라도 외지인의 발길이 드문 구간은 있다. 하동중간 지점인 삼화실~대축 구간(16.9킬로미터)이다. 지리산둘레길 22개 구간 중 남원·함양의 인월-금계 구간 다음으로 긴 코스다. 재를 세 개나 넘어야 해서 다소 힘들긴 하지만 그만큼 고즈넉하고 아름다운 풍경을 만날 수 있는 구간이다.
다양한 마을 풍경과 숲을 두루 만날 수 있는 이 구간은 그 길이가 다소 길고 산길이 많기 때문에 오래 걸을 수 있는 체력도 필요하다. 약 17킬로미터 거리로 하루 걷기로는 꽤 긴 편이다. 아침 일찍부터 걷는다면 하루에, 구간을 둘로 나눈다면 이틀에 걸어도 괜찮다. 중간에 힘에 부친다고 느껴지면 먹점마을에서 하루 묵어가도 좋다.
오지의 산촌 마을을 경험하고 싶은 사람에게 추천하고 싶은 길이다. 식당이나 매점도 거의 없기 때문에 이 구간을 걸으려면 꼭 도시락을 챙겨야 한다. 길 초입의 버디재와 구간 중간의 신촌재, 그리고 연이은 먹점재와 구제봉갈림길까지 하루 종일 고개를 오르락내리락한다. 먹점재에서 대축마을까지 가는 숲길은 퍽 한가롭고, 간혹 섬진강도 내려다보인다.
드디어 장거리 도보길의 시작점에 선다. 초입인 이정마을에서 큰길을 건너 버디재에 오른다. 마을과 임도를 지나 산길로 들어선다. 지리산둘레길에서 숲길로 진입하는 경로는 대개 비슷하다. 등산을 할 때처럼 바로 숲으로 들어가는 일은 거의 없다. 마을이 끝나는 길에 임도가 있고 임도가 끊어지면 숲길이 이어진다. 사람 사는 곳을 거쳐 산으로 올라서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숲으로 들어서는 길에서 때때로 묘한 고독이 인다.
하지만 사람이 별로 없는 대신, 혼자인 대신, 자연은 더 가까이 느낀다. 다람쥐도 꿩도 고라니도 더 자주 모습을 드러낸다.
나무도 야생화도, 땅에 박힌 산나물과 풀뿌리들도 더 자세하게 보인다. 새소리도 바람 소리도 어쩐지 또렷하게 들린다. 조금만 더 노력하면 여기 펼쳐진 자연의 무수한 소리들과 대화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에 부푼다. 그들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으리란 동심이 움튼다.
재 너머 마을, 다시 재 너머 마을이다. 산촌 마을의 진수를 보여준다. 그야말로 깡촌이다. 재는 깊고 더불어 재 너머 마을도 깊다. 사람들은 여전히 순박하다. 얼마 전만 해도 오지였을 이 길은 걷는 이에게 좀 더 겸손하라 말한다. 산보다 빌딩이, 숲보다 네온사인이 더 익숙한 도시인이 산촌길을 묵묵히 걷는다. 그렇게 걷고 걷고 또 걷다 보면 다시 도시로 돌아갈 엄두가 나지 않을 만큼 산촌의 무던한 시간이 몸에 배인다.
깊은 산골에 다랑이논이 흔하다. 비탈에 첩첩이 들어앉은 다랑이논에서 일하는 촌부를 엿본다. 구경꾼이야 아름답게 보건말건 그 땅의 농부에게는 쉽지 않은 일터일 테다. 당사자와 구경꾼 사이에는 언제나 냉혹한 간극이 존재한다. 둘레길에 자리한 산촌을 바라보는 도시의 여행자 눈에는 시골 마을이 마냥 평화롭게만 보인다. 이곳에 살면 마음의 안식쯤은 절로 찾아올 것 같다.
신촌마을에 도착하자 배가 고파온다. 하지만 도무지 구멍가게 하나 보이지 않는다. 아침에 도시락을 준비하지 못한 것이 실수다. 이 마을에서 밥을 먹지 못하면 앞으로 남은 길 위에서 허기에 지칠 것이라는 걱정이 앞선다.
그러던 차에 길에서 만난 어르신 한 분, 점심은 먹었느냐 먼저 물어봐주신다. “밥 한 그릇 주랴?”는 어르신 물음에 그길로 염치불구하고 쫄래쫄래 댁까지 좇아간다. 어르신은 4대째 신촌마을에 살고 있는 이 마을 터줏대감이다. 집도 100년이 훌쩍 넘었다. 집 자체가 생생한 가족의 역사고 마을의 역사다. 4대가 나고 자랄 때마다 든든히 받쳐주던 마루, 그 마루에서 밥을 먹는다.
얻어먹는 밥은 송구하고 또 고맙다. 섣불리 돈을 내밀 수도 없다. 감사하다는 말만 연거푸 뱉어낸다. 길 위에서 처음 만난 사람에게 한 그릇의 밥을 얻어먹는다는 것은 신기하고도 따뜻한 경험이다. 밥에서 인심이 흐른다. 정이 오간다.
시골길과 숲길은 저마다 독특한 멋
지리산둘레길을 걸으며 편안하면서도 힘겹고 익숙하면서도 생경한 이 길이 꼭 사람 사는 모양 같다는 생각이 든다. 평이하다가도 가팔라지고 힘겹다가도 쉴 틈을 주는, 지루하듯 스릴 넘치는 둘레의 길. 다채롭게 펼쳐지는 시골길과 숲길은 특별하지 않아도 저마다 독특한 멋을 낸다. 특별하지 않아서 정겹다.
시골 아낙이 머리에 수건을 쓰고 밭일을 하는 시골길을 걸으며 시골집에 온 듯 푸근함을 느끼고 누렇게 이지러지는 논두렁을 스치며 훈훈한 풍요의 향기를 맡는다. 그건 무엇을 얼마나 가졌느냐와는 상관없는 마음으로부터의 여유다. 투박한 옷을 입고 자글자글 검게 주름진 농부의 얼굴, 땅을 일구는 그들에게 모자람은 있겠으나 불안은 없다. 말끔하게 차려입은 도시인의 얼굴에서 우리는 얼마나 자주 불안과 권태로 찌든 얼굴을 마주하는지.
신촌마을을 벗어나 임도 따라 신촌재에 오른다. 밥심으로 걷는다. 신촌재를 넘어서면 먹점마을이 있다. 먹점마을도 여느 산촌처럼 아담하다. 초봄에 오면 산자락이며 길가에 매화가 만발하는 매화마을이다. 마을의 20여 가구도 대부분 매실농사를 짓는다.
다시 먹점재에 오른다. 숲길이다. 모퉁이를 돌 때마다 언뜻언뜻 스치는 섬진강과 평사리 들판도 점점 가까워진다. 섬진강을 발견한 후부터는 약속에 늦은 사람처럼 조바심이 난다. 얼른 내려가 섬진강과 인사하고 싶어진다. 섬진강도 지리산 자락의 이 길들처럼 구불구불 흐른다.
문득 얼마 전 같이 길을 걷던 한 지인의 말이 떠오른다. 등산이나 걷기만큼 돈 안 들이고도 가슴 뿌듯하게 휴일을 즐길 수 있는 취미활동이 또 있겠느냐는.
글과 사진·이송이(여행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