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 태안 일대에는 박속밀국낙지탕이라는 특이한 이름의 향토 음식이 있다. 육수에 나박썰기로 숭덩숭덩 썬 박속과 파, 마늘, 고추 등을 넣고 끓이다가 낙지를 산 채로 넣어 데쳐 먹고 마지막에 칼국수와 수제비를 그 국물에 끓여 식사로 마무리하는 음식이다. 낙지연포탕과 비슷하지만 박속이 들어가는 것이 특별하다.
우리나라 음식의 명명법은 통상 주재료명이 맨 앞에 나오고 다음에 부재료명, 그리고 주조미료명, 주요리법의 순서로 이어지는 것이 상례다. 그러나 통상 부재료명이나 조미료명 중에 하나는 빠지는 경우가 흔하고 재료명과 요리법만으로 명명하는 사례도 빈번하다. ‘동태고추장조치’나 ‘조기구이’ 등이 그런 예에 속한다. 박속밀국낙지탕의 경우는 박속과 밀국낙지라는 두 가지 재료와 탕이라는 요리법으로 구성된 실례다.
밀국낙지는 밀이 나는 초여름에 태안에서 잡히는 낙지의 별칭인데, 육질이 연하고 맛이 좋기로 유명하다. 봄에 산란해서 발이 가는 이 낙지를 태안 사람들은 밀낙이라고도 부르는데 호남에서는 세발낙지라고 한다.
일반 낙지는 가을이 제철이지만 밀낙은 지금이 한창때다.
그런데 밀국에 대해서는 다른 해석도 있다. 밀국이 밀가루로 밀어 만든 칼국수와 수제비를 뜻한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박속낙지밀국’이라 부르는 것이 옳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어쨌거나 박속밀국낙지탕은 재료들이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는 음식이다. 그 유래야 먹고살기 힘들던 시절에 허기를 채우기 위해 그 지역에 흔히 나는 재료로 만들어 먹던 구황음식에서 비롯되었다지만, 그 맛은 달곰하면서도 개운한 것이 가히 별미라 할 만하다.
무보다 더 시원한 국물을 내는 박은 판소리 <흥부가>에서 “박속일랑은 끓여먹고, 바가질랑은 부잣집에다 팔어다가 목숨 보명을 허여 보세”라고 한 바로 그 박이다. 예전에는 초가집 지붕에 주렁주렁 열리던 흔한 것이지만 요즘은 우리 일상에서 만나기가 힘들어진 식재료다. 덜 익은 박을 따서 속을 파낸 후에 길게 썰어 말린 박고지는 반찬으로 쓰며, 박속을 엿에 담가 과자를 만들어 먹기도 한다.
조선 말의 요리책 <시의전서>에는 박나물, 박김치 등도 나온다. 박은 단백질과 탄수화물이 많이 들어 있고 식물성 칼슘도 풍부하게 함유되어 있는 훌륭한 영양 식품이다.
다른 재료인 낙지는 오래전부터 ‘뻘 속의 산삼’이라고 했을 만큼 스태미나 식품으로 명성이 드높았다.
정약전의 <자산어보>에도 낙지를 “빛깔이 희고 맛은 감미로우며 회와 국 및 포를 만들면 좋다. 이를 먹으면 사람의 원기를 돋운다”고 했다. 심지어는 “야윈 소에게 낙지 네댓 마리를 먹이면 금방 기력을 회복한다”고 그 효능을 극찬했을 정도다. 지금도 남도 지방에는 출산이나 병치레하는 소에게 낙지를 먹이는 풍습이 남아 있다.
낙지를 한자로는 석거(石距), 소팔초어(小八梢魚), 낙제(絡蹄)라고 했다.
조선시대 궁의 연회 기록에도 낙제탕(絡蹄湯)이나 낙제초(絡蹄炒)가 올라 있는 것을 보면 그 시절에도 낙지는 귀한 식재료 대접을 받았던 모양이다.
데친 낙지도 일품이지만 박속과 함께 우려낸 국물은 상큼하면서도 감미롭다. 그 국물에 끓인 칼국수와 수제비도 그리 쉽게 만날 수 있는 맛은 아니다. 요즘같이 좋은 계절에 아름다운 태안반도를 찾아 박속밀국낙지탕도 맛보고 낙조도 구경한다면, 머리도 식히고 보양도 하는 일석이조가 되지 않을까. 태안반도 북쪽에 위치한 이원면의 ‘이원식당’과 원북면의 ‘원풍식당’이 박속밀국낙지탕으로 알려진 집들이다.
글·예종석(한양대 경영학부 교수·음식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