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우리나라 역대 임금들 중 정조를 가장 좋아한다. 아버지 사도세자의 비통한 죽음을 평생 마음에 품고 산 애틋함 때문도 아니요, 백성의 고달픔을 무엇보다 먼저 살핀 애민사상(愛民思想) 때문도 아니다. 신하들이나 수원 화성을 축조하는 기술자들과의 술자리에서 그가 늘 첫마디로 했다는 이 한마디 때문이다.
‘불취무귀(不醉無歸).’
‘취하지 않으면 돌아가지 못한다’ 는 뜻이다. 양반의 권위의식이 하늘에 닿았던 계급시대에 조선의 제1인자 정조는 기술자 ‘따위’ 천것들과 어울려 술을 마시며 불취무귀를 부르짖었던 것이다. 정조의 사랑을 받았던 정약용은 유배생활 중 아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춘당대에서 임금을 모시고 공부하던 중 좋은 술을 큰 사발로 하나씩 하사받았는데 그때 여러 학사들이 곤드레만드레 되어 정신을 잃고 혹 남쪽을 향해 절을 하고 더러는 자리에 누워 뒹굴고 하였다”고 임금과의 술자리 풍경을 기록했다. 왕에 대한 예의범절이 엄격한 시절에도 이런 풍경이 있었던 것이다. 이는 예의에 합당한 것일까, 예의를 벗어난 것일까?
예의란 절대적으로 고정된 고루한 형식이 아니다. 예의는 시대에 따라 변한다. 내 어머니가 어린 시절, 여자의 목소리가 담장을 넘는 것은 예가 아니요, 여자가 글을 가까이 하는 것도 예가 아니었다. 내가 어린 시절, 여자가 맨발을 남에게 보이는 것은 예가 아니요, 여자가 남자를 이기려 드는 것도 예가 아니었다. 지금 어디 가서 그런 소리를 했다가는 성차별이라고 비난이 쏟아질 것이다. 오히려 남성들이 역차별을 주장하고 있는 시대가 아닌가.
사소한 일상의 예도 시대의 변화와 궤를 같이한다. 예전에는 해가 저물고 남의 집에 가거나 밤 9시 넘어 전화하는 것조차 예가 아니었으나 요즘에는 이른 아침에 남의 집을 방문하거나 전화하는 것이 예가 아니다.
해 뜨면 일을 시작해서 해가 저물면 일을 끝내야 했던 농경문화와 하루 3교대로 온종일 기계를 가동해야 하는 산업사회 문화의 차이가 예의 차이를 불러온 것이다.
예의 형식은 시대에 따라 변하지만 예의 본질은 시대의 변화를 초월하여 존재한다. 내가 정조의 ‘불취무귀’ 정신을 사랑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정조는 스스로 임금의 권위를 내려놓음으로써 신하와 백성의 마음을 위로했다. 계급에 얽매이지 않고 인간 대 인간으로 만나고자 하는 임금의 마음은 그 자체로 신분에 매인 사람들에게는 가장 큰 위로였을 것이다. 요즘 하루가 멀다고 이른바 ‘갑의 횡포’가 신문지상을 장식하고 있다. 정조는 ‘불취무귀’를 부르짖으며 을의 마음을 배려하고 위로하는 아름다운 ‘갑’이었다.
글·정지아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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