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양 하면 단박에 떠오르는 것은 역시 고추다. 영양으로 들어서자 가로등 위에도 빨간 모형 고추가 주렁주렁 달렸다. 영양고추의 알싸한 맛은 그토록 깊숙이 들어앉은 마을의 청량한 기운에서 오는 것일까. 석가탄신일에 길을 잘못 나섰다가 도로가 주차장이 되어버리는 바람에 영양까지 가는 길은 명절의 귀성길 못지않은 장장한 고행의 길이 되었지만, 막상 도착한 곳의 신선한 기운은 그러한 고생길을 참 쉬이도 잊게 해준다. 그렇게 오래 달려온 이유로 이곳은 이처럼 맑다.
뭇사람들이 쉬이 다가서지 못하도록 첩첩이 산으로 둘러싸인 마을들. 예부터 청송과 봉화·울진·영덕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스스로 깊은 자리에 앉기를 자처했던 때문일까. 그 고요하고 맑은 기운은 여태도 그리 달라지지 않았다. 영덕과 울진이 대게의 명성을 누리며 외지인의 발길을 끌어들이고, 봉화가 금강송과 송이축제로 청정의 이미지를 심으며 유명세를 타는 동안에도 어쩐지 영양은 주변의 들썩임을 못 본 척, 못 들은 척 혼자서만 유유히 제 갈 길만 가는 고집스러운 선비의 모양새다.
숲을 걸으며 숲의 시간 속으로 들어가다
깊은 산자락과 골짜기가 어우러진 때문인지 영양에는 걷기 좋은 길도 많다. 버선을 닮았다 해서 외씨버선길이라 이름 붙인 도보길은 청송·영양·봉화·영월을 이으며 170킬로미터나 뻗어 있고 태백의 매봉산에서 부산 다대포의 몰운대까지 한반도의 등뼈를 이루며 장장 400여 킬로미터를 달려나가는 낙동정맥 등산로도 영양을 통과해 다시 길을 낸다.
하지만 소박하나마 풍성한 길을 좋아하는 여행자, 그렇게 거창한 길을 택하지 않는다. 누구나 한번쯤 걷기를 희망해봄 직한 거나한 길보다는 마을 깊숙한 곳 어느 한가로운 숲으로 발길을 잡는다.
두 팔 가득 한아름 영양을 품고 있는 일월산, 그 아랫자락의 작은 마을 대티골로부터 시작하는 ‘아름다운 숲길’은 10킬로미터가 채 되지 않는 고즈넉한 길이다. 이 길은 외씨버선길과 중첩되기도 하고 영양의 옛 국도를 보여주기도 하며 한가로이, 고즈넉이 아무도 번잡하게 떠벌리지 않는 고요한 숲길을 내고 있다. 길은 깊은 숲 속이면서도 오르막을 거의 느끼지 못할 정도로 편안하다. 길 폭을 넓힌 채로 한참을 걷다가도 숲 속 깊은 곳으로 계곡을 따라 오솔길을 내는 아기자기한 맛도 있다. 환형으로 이어진 길은 8~9킬로미터를 한 바퀴 돌아 내려오면 대티골을 지나 다시 처음 진입점으로 돌아오게 된다.
이곳은 2009년 생명의 숲이 주최한 ‘아름다운 숲길’ 공모에서 어울림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런 것이야 순위 매기고 상 주길 좋아하는 사람들이 하는 놀음일 뿐, 숲은 사람들이 좋아하건 말건 그 나름의 생태를 유지하며 끊임없이 생명을 밀어올리고 또 잦아들게 한다.
숲길을 걷는 것은 다만 숲을 통과하는 것이 아니라 숲에서 일어나는 모든 생사를 담담히 지켜보며 잠깐이나마 숲의 시간을 함께 맞아 그 영원의 시간을 지내보는 것이다. 그래서 숲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는 것은 숲을 바라보는 구경꾼이 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무시로 살아 움직이는 풀과 나무와 꽃과 흙과 새와 작은 벌레들처럼 숲 속에 하나의 생명으로 녹아들어 그들의 삶을 몸소 체험하고 소통하는 것이다.
“요즘 솔방울을 자연의 가습기로 쓴다지요? 솔방울이 왜 물기가 있을 때는 입을 다물고 있다가 건조할 때 입을 여는지 아세요?
솔방울은 원래 소나무의 씨앗을 품고 있었지요. 맑고 건조한 날에는 바람에 씨앗이 멀리 날아가도록 입을 여는 것이고, 비가 와서 물에 젖을 때는 씨앗을 보호하기 위해 입을 닫는 거예요. 바닥에 떨어지고 그 수명과 역할을 다해 씨앗을 잃어버리고 나서도 여전히 맑은 날엔 입을 벌리고 비가 오면 입을 닫죠. 솔방울은 씨앗의 번식과 보호의 본능을 제 몸이 썩어 없어질 때까지 잊지 않는거예요.”
숲 해설가 정종훈씨의 말이다. 무시로 발에 채이던 솔방울의 삶이 처연하게마저 느껴진다. 솔방울만이 아닐 것이다. 숲에서 살아가는 모든 생명들의 삶이 본디 이러할 것이다. 그래서 여름이 오면 단 한 번도 어기지 않고, 잊지도 않고 풍성한 초록의 그늘을 지치도록 드리우는 것일 테다.
신비로운 숲의 삶이다. 생명의 길이다. 솔방울 하나에서 철학 하나를 배운다. 사람들의 발길이 잦은 길에서는 언감생심 느껴보지 못할 감상이다. 오이풀·생강나무·산초나무잎을 비벼 코에 갖다댄다. 있지도 않은 오이를 한입 베어 문 것 같기도 하고 생강, 산초 가루가 흩날리는 듯도 하다. 풀들이, 나무들이, 하늘하늘 꽃들이, 그리고 솔방울들이 불현듯 말을 걸어오는 오후다.
사람이 비로소 그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갈 수 있을 때는 자연 속에 있을 때가 아닐까. 자작나무가 껍질을 벗듯, 번데기가 껍질을 벗듯, 사람이 가면과 위선을 한꺼풀 벗고 엄마 말 잘 듣는 어린애처럼 순순한 얼굴로 햇볕을 쬐는 때는 아마도 자연 속에 폭 파묻히듯 안기는 때가 아닐까.
‘아름다운 숲길’을 걸으며 손으로 샘물을 떠 마신다. 낙동강 발원지라는 샘물. 바위틈 거미줄을 걷어내고 맑게 솟아나는 샘물을 뜬다. 그 물이 아무리 맑다 해도 위생관념이 과도한 도시 처녀가 혼자 그런 용기를 낼 리는 없다. 말없이 숲 해설가가 하는 것을 따라 해볼 뿐이다.
맨발로 걸으며 더덕 캐먹는 ‘원초적 걷기’
더불어 샘 근처에서 야생 산더덕 줄기 하나를 발견한다. 고 작고 여린 뿌리 하나가 내는 그윽한 향이 절로 감탄사를 연발케 하고 눈까지 지그시 감게 한다. 본능처럼 샘물에 흔들어 흙을 털어내고 입으로 가져간다. 더덕뿌리를 질겅질겅 껌처럼 씹으며 내려오는 길이 내내 향긋하다. 전문가의 앎에 기대어 숲에 좀 더 가까이 다가가는 것이다.
‘아름다운 숲’이 만들어놓은 길은 전혀 힘들이지 않아도 되는 길이다. 갈 때는 금강송이 가로수처럼 길을 따라 마중하는 넓고 큰 숲길을 걷고 올 때는 계곡을 따라 한여름에도 낙엽이 잔뜩 쌓인 작은 오솔길을 걸어 내려온다. 낙엽이 쌓인 길은 맨발로도 좋다. 신발 안에 꼭꼭 감춰두었던 뽀얀 발이 비로소 오래된 숲의 맛을 경험하는 순간이다. 발에 닿은 낙엽은 연신 보스락보스락 소리를 내고, 나는 기다리는 사람이 없어 더 느긋하게 걷는다.
발은 거친 돌을 밟으며 욱신거리기도 하고 고운 흙을 밟으며 부드러운 촉감도 느낀다. 비로소 오감이 느끼는 숲은 머리가 알던 숲과는 다른 세계다. 그야말로 신세계다. 초여름에도 얼음같이 찬 계곡물에 발을 담그고 도시의 피로와 발에 묻은 흙을 동시에 털어낸다.
글과 사진·이송이(여행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