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지춘향이라는 말이 있다. 변사또가 억지로 춘향에게 수청을 들게 한 사건에서 유래한다. 억지춘양이라는 말도 있다. 봉화군 춘양역은 직선의 영동선 철도 가운데 Ω자 형태로 뜬금없이 불쑥 튀어나왔다. 마치 억지로 철로를 휘어놓은 모양새다.
만산 고택은 춘양면 마을의 중심에서 살짝 벗어난 자리다. 고택의 정취가 좋아 부러 돌아가더라도 마다할 이유가 없다. 그 규모나 생김이 오래도록 시선을 머물게 할 만큼 빼어나다. 고택이 즐비한 경북의 북부지방에서 어느 한옥과 견주어도 뒤지지 않는다. 그러니 억지춘양은 그리 나쁜 뜻은 아닌 듯하다.
고택까지는 버스터미널이나 역에서 내려 10분 정도면 걸어갈 수 있는 거리다. 시골 마을의 번화가를 지난다. 소담한 풍경은 나른하고 안온한 기운을 품었다. 봉화 동북부의 고산협곡답게 주변을 둘러싼 깊은 산세도 한몫한다. 그 풍경에 젖어들 만할 때 고택이 모습을 드러낸다. 무려 11칸짜리 행랑채다. 만산 고택의 자부심이다. 조선 말에 이르러는 누구나 세웠지만 원래 그 자체로 가문의 위엄을 대변했다. 정3품 이상의 벼슬에 올라야 지을 수 있었다.
만산은 고택을 지은 강용(1846~1934)의 호다. 그는 영릉참봉, 통정대부, 중추원 의관 등을 지낸 고종 때의 문신이다. 을사늑약이 맺어지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했다. 집은 그보다 앞선 1878년에 지었다. 130년이 넘은 고택으로 당시 사대부 집안의 전형이다.
솟을대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선다. 대문 오른쪽에는 마루다. 행랑채에 방을 두는 경우는 많으나 마루를 두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첫걸음부터 저만의 멋스러움이다.
행랑의 마당을 뒤로하고 다음 걸음을 낸다. 정면에 사랑채가 마중한다. 강용 선생이 거주하던 방이다. 2통간의 대청과 2통간의 사랑방으로 이뤄져 있다. 사랑방 오른쪽에는 조상의 신위를 모시는 감실이다. 마루 뒤에는 마루방과 골방이 안채로 오가는 길을 연다. 그 뒤편에 안마당을 낀 안채가 숨었다. 우선은 사랑채의 위풍만으로 늠름하다.
문화재급 현판 글씨는 집주인의 지위 가늠
춘양목은 궁궐을 지을 때 쓰인 목재다. 보통 소나무보다 성장 속도가 3배나 느리다. 당연히 나이테가 조밀해 뒤틀리거나 갈라지는 일이 적고 잘 썩지 않는다. 춘양 지역에서 자라는 금강송에 붙이는 이름이다. 다른 지방에도 춘양목으로 지은 집이 적지 않지만 본토가 가지는 힘은 무시할 수 없다. 춘양 제일의 고택에서 마주하는 춘양목은 한층 꼿꼿하고 단단하다.
사랑채에는 만산(晩山)이라는 현판 또한 또렷하다. 대기만성을 의미하는 말이다. 흥선대원군이 썼다. 만산 고택은 곳곳의 현판 글씨만으로도 당시 강용의 지위를 짐작하게 한다. 만산 현판 왼쪽의 정와(靖窩)는 서예가 강벽원의 글씨다. 존양재(存養齋)는 3·1운동 33인의 한 명인 독립운동가 오세창이 썼다. 사랑채 북쪽에는 서당채가 있다. 사면이 모두 지붕을 이루는 우진각지붕의 건물이다.
그 아래에는 한묵청연(翰墨淸緣)이라는 현판이 걸렸다. 고아한 학문을 닦는다는 의미로 이 또한 각별하다. 고종의 아들 영친왕이 여덟 살 때 쓴 글씨다. 다만 아쉽게 모두 탁본이 걸렸다.
몇 차례의 도난에 있은 후에 실물은 연세대학교 박물관에 보관하고 있다.
춘양목과 현판의 글씨들이 고택의 위엄이라면 사랑채 앞에는 정감을 더하는 요소가 시선을 끈다. 기단과 나란한 화분의 행렬이다. 올망졸망하고 도란도란하다. 정성이 가득하다. 안주인 류옥영(62)씨의 세심한 손길이다. 사랑채 앞뿐일까. 눈길을 돌리니 만산 고택은 여느 고택과 달리 생기가 넘쳐난다. 초록의 공간이 넓고 야생화들이 구석구석에 피어난다.
고택은 시간의 무게가 본의 아니게 사람을 주눅 들게 하는 경우가 많다. 만산 고택은 그렇지가 않다. 사계절 화사하고 생기가 돈다. 근엄하기보다 인자한 할아버지다. 고택의 위엄은 간직하되 사람 사는 집의 활력과 생명력이 넘쳐났으면 하는 안주인의 바람이다. 묵으러 오가는 방문객들이 많으니 그들에게도 한층 따스한 기운을 전하려는 배려다. 덕분에 사랑마당의 100년 대추나무 아래로, 자그마한 원형의 화단 곁으로 괜스레 들뜨는 걸음이다.
버드나무 아래서 맡는 작약의 향
초록의 길을 따르면 자연스레 칠류헌(七柳軒)에 다다른다. 사랑채의 남쪽에 낮은 담장을 쌓은 별채다. 중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서자 고풍스러운 건물이 맞이한다. 만산 고택의 손님을 맞는 영빈관의 역할을 하던 장소다. 안채와 분리해 손님의 편의를 도모했다.
그 이름은 도연명의 오류선생전에서 빌려왔다. 그는 집 앞에 다섯 그루의 수양버들을 심고 자신을 오류선생이라 칭했다. 강용 선생은 일곱 그루의 버드나무를 빌려 칠류헌이라 칭했다. 그 안에는 월화수목금토일의 천지가 순환하듯 국운의 조속한 회복을 바라는 충정이 어렸다. 도연명의 철학과 사상을 본받고자 하는 다짐도 서렸다.
칠류헌은 그 자체로 만산 고택 건축의 백미다. 대청마루는 뒤틀림이 없고 대들보의 묵직한 기운은 흔들림 없이 견고하다. 칸과 칸 사이는 팔각형의 완자무늬 창호가 멋스럽다. 칠류헌의 현판 역시 독립운동가 오세창의 글씨다.
푸른색의 주련에는 백석산방(白石山房)이라 적혔다. 영친왕의 스승인 해강 김진규의 글씨다. 선비가 여유롭게 거처하는 곳이란 뜻이 담겼다. 마루에 올라앉으면 담장을 따라 화단이 곱다. 그 너머로 사랑채와 서실이 살며시 모습을 드러낸다. 칠류헌의 실내는 천장이 높아 시원스럽다. 대청마루 가장자리에는 사발 그릇의 무리가 단정하게 자리를 잡았다. 이 또한 안주인의 솜씨다.
사랑마당으로 돌아 나오는 길에는 작약꽃이 화려하다. 분홍빛의 꽃잎은 지름이 10센티미터에 다다른다. 그 품에 노란색 수술이 색의 대비를 이룬다. 유월의 온기를 제 몸 가득 품어 담아 뿜어낸다. 저토록 붉은 꽃을 어쩌다 그냥 지나쳤을까 싶다. 안채로 이어지는 길가로도 연신 꽃들이 방실댄다. 다시 한 번 만산 고택만이 줄 수 있는 특별한 즐거움을 만끽한다.
안채 건물도 독특한 특징이 하나 있다. 바로 용마루다. 11단을 올렸다. 중요무형문화재 제121호 번와장 기능보유자인 이근복씨의 솜씨다. 콘크리트 마당이 갖는 아쉬움을 말끔히 씻어낸다.
다시 사랑마당으로 나와 대청마루에 오른다. 너른 행랑채 너머 산세의 풍경이 눈에 찬다. 차 한 잔을 들고는 숨을 고른다. 따스한 햇볕이 기운다. 여리나마 너울대는 바람도 인다. 마음 깊은 곳의 적요다. 시간은 천천히 차올라 옛 가옥의 기품과 생기를 전한다. 춘양의 만산(晩山)이다. 여름의 길목에서 봄볕[春陽]이라는 고장의 이름이 새삼스럽다.
글과 사진·박상준(여행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