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사는 지리산 아래 구례에는 운조루(雲鳥樓)라는 고택이 있다. 새처럼 구름 속에 숨어사는 집이라는 의미의 운조루는 영조 때 낙안 군수를 지낸 유이주(柳爾胄, 1726~1797)가 지은 집으로, 조선후기 건축양식의 특징을 고스란히 지닌 양반 가옥 중 하나다. 지리산을 등지고 널찍한 들을 휘돌아 흐르는 섬진강을 굽어보는 풍광도 일품이지만 운조루에는 그 풍광을 뛰어넘는 아름다운 것이 셋이나 있다.
그중 첫째는 지붕보다 훨씬 낮은 굴뚝이다. 굴뚝은 원래 높아야 제맛이다. 그래야 연기가 집 안으로 흘러들지 않는다. 운조루가 매운 연기를 감내하고 굴뚝을 낮게 지은 것은 밥 짓는 연기가 먼 데서 보이지 않게 하기 위해서다. 내남없이 굶주리던 시절, 운조루의 밥 짓는 연기가 이웃들의 허기를 더할까 저어한 깊은 마음씀의 결과다.
둘째는 부엌에 있는 커다란 나무 뒤주다. 커다란 통나무의 속을 대충 파낸 이 뒤주에는 무려 쌀 두 가마 반이 들어간다고 한다. 소박하기 짝이 없는 이 뒤주를 아름답게 만든 것은 출구 부분에 조그맣게 새겨진 ‘타인능해(他人能解)’라는 글귀의 의미다. 타인능해, 말 그대로 누구라도 능히 열 수 있다는 뜻이다. 유씨 가문은 이웃들의 굶주림을 염려하여 해마다 수확량의 20퍼센트를 이 뒤주에 담아 쌀이 떨어진 사람이면 누구나 퍼갈 수 있게 했다.
유씨 가문은 재산을 지키고 늘리는 길보다 이웃과 더불어 사는 길을 선택했다. 하여 흉년에 급매로 나온 땅은 절대 사지 않았다. 몇 되의 쌀에 땅을 넘길 수밖에 없는 배고픈 백성들의 슬픔을 헤아린 까닭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나눔의 마음이 수백 년에 걸쳐 유씨 가문의 재산을 지키는 힘이 되었다. 수백 년간 조상의 따스한 마음과 함께 땅까지 고스란히 지켜온 유씨 가문은 어떤 일이 있어도 땅을 팔지 않기로 소문이 자자하다.
그런 유씨 가문이 몇 해 전 땅을 처분했다. 그 땅에 한옥 마을을 지어 구례를 널리 알리겠다는 군청의 설득에 기꺼이 땅을 내놓고 나서 유씨가문 종부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종부에게 그토록 아끼던 땅보다 더 소중한 것은 이웃과 함께 살아가야 한다는, 이웃의 아픔을 외면하지 말아야 한다는 선조의 마음이었다. 칠순 넘은 이 종부는 요즘도 4킬로미터 남짓 되는 논밭까지 굽은 허리로 부지런히 걸어가 손수 농사를 짓는다. 요즘 같은 시대에 낡은 한옥에 사는 종부의 삶이 고달프지 않을 리 없다. 그러나 종부는 기꺼이 그 불편을 감내한다. 아마도 그 집에 담긴 선조의 마음이 종부들로 하여금 혼신을 다해 그 집을 지키게 하지 않았을까 짐작한다.
남존여비 사상이 지배적이었던 조선시대에 함부로 집 밖으로 나서지 못하는 여성의 답답함까지 고려한 운조루가 바로 이 고택의 세 번째 아름다움이다. 운조루는 고택 전체의 택호임과 동시에 사다리 타고 올라가는 ‘망루’의 이름이기도 하다. 운조루는 조선 최초이며 아마도 최후의, 여성을 위한 망루일 것이다. 집 안에 갇혀 계절의 변화조차 알기 어려웠던 여인들을 위해 유이주는 높은 곳에 올라가 바깥 구경을 하라고 안채에 망루를 만들었다.
운조루의 아름다움은 건축미도 아니요, 지리산과 섬진강을 아우르는 풍광도 아니요, 핍박받는 여인네와 고통받는 이웃의 아픔을 아우르는 그 넓고 깊은 품에 있다. 덕분에 무수한 민란과 동학과 전쟁도 운조루를 비켜 갔다. 깊고 넓은 마음이야말로 모진 세월을 견디는 가장 위대한 무기다.
글·정지아(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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