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 홍성 고미당마을은 학성산 아래 반계천이 흐르는 배산임수의 지형이다. 미(米)가 들어간 이름 그대로 벼농사가 주업이다. 미(美)라고 읽히니 아름다움인들 빠질까. 백제시대에는 왕이 잠시 머물렀다 해 ‘얼라하’라고도 불린다. 마을 인구는 100명이 조금 넘는다. 전형적인 시골이다. 양주 조씨는 병자호란 때 장곡면 산성리에 터를 잡았다. 고택은 19세기경에 지은 것으로 추정한다. 지금은 후손 조환웅 씨가 산다.
사운고택 우화정은 중요민속문화재 제198호다. 마을회관 옆 골목에서 100미터 거리다. 초입에는 520년 수령의 느티나무가 있다. 노신제를 지내던 나무다. 마을 사람들에게는 친근하면서도 영험한 존재다. 몇 걸음 더 나아가니 정자 곁에 은행나무도 뿌리내렸다. 240년 수령이다. 든든한 고목이 너른 그늘을 드리운다. 길을 따라 짙은 초록의 나무들이 터널을 이룬다. 천천히 걸음을 낸다.
우화정에 들어서기에 앞서 비석 하나와 연자방아가 눈길을 끈다. 비석에는 고 조응식씨(1929 ∼2010)가 지은 글이 적혔다. ‘배품의 역사를 가슴에 새기며 조가네 전통을 이어서 나가자’라는 글귀가 인상적이다. 조씨가 학성산에 올라 동생들에게 지어 가르쳤던 노래다. 양주 조씨 집안의 자긍심을 높이기 위함이다. 그의 아들 조환웅 씨가 작은아버지의 기억을 더듬어 비석으로 남겼다. 양주 조씨는 인조의 계비 장렬왕후를 배출한 집안이다. 후로도 정승만 여섯 명이 나왔다. 한때는 본채만 99칸에 달하는 명문부호였다. 현재는 60칸 남짓이 남았다.
시비를 뒤로하고 우화정과 마주한다. 입구는 여섯 칸 반짜리 대문채다. 왼쪽에 세 칸 반, 오른쪽에 두 칸이다. 그 가운데 솟을 대문이 위치한다. 사운고택이라 적혔다. 사운(士雲)은 조환웅 씨 고조부의 호다. 구름 같은 선비란 의미다. 절로 유유자적(悠悠自適)이란 말이 떠오른다.
행랑채에서 동쪽으로 이어지는 담장에는 대문이 하나 더 있다. 안사랑채로 들어가는 협문이다. 얼방문( 方門)이라 적혔다.
얼( )은 큰 어른을 뜻하는 한자로 백제의 임금을 말한다. 장곡면은 원래 오사면과 성지면, 얼방면으로 이뤄져 있었다. 얼방은 백제의 왕을 기리는 옛 지명을 기억하려는 의지다.
솟을대문을 지나자 ‘一’자형 사랑채가 맞이한다. 그 뒤쪽에는 ‘ㄱ’자형의 안채가 위치한다. 동쪽 협문의 안사랑채는 그 오른쪽이다. 행랑채와 사랑채 사이의 마당은 그리 넓지는 않다. 한적하게 햇살을 받으며 걷기에 부족함이 없을 정도다. 남서향이라 볕이 따스하게 기운다. 건물 뒤쪽으로는 낮은 산의 소나무들이 우거진다. 기와는 노송의 푸름을 등에 인다. 마당의 좌우에는 정원을 꾸몄다. 봄날의 철쭉이 필 때 가장 화려하다.
뒷산 노송의 푸르름과 마당의 화려한 정원 조화
사랑채는 다섯 칸 반 크기다. 장방형 돌로 정성껏 쌓은 기단 위에 지었다. 얼핏 봐도 굳세고 단단하다. 계단을 올라 안을 살핀다.
중앙에 대청마루를 두고 좌우에 방을 배치했다. 대청마루는 한칸이다. 그리 큰 규모는 아니다. 사랑채에서 두드러지는 공간은 오히려 동쪽 끝자락의 누마루다. 역시 한 칸의 작은 방이지만 누마루가 갖는 풍류는 여느 고택과 다르지 않다. 특유의 시각적 환희다.
삼면으로 열린 문으로 사방의 풍광이 들어찬다. 남쪽으로는 토종 장미가 핀 화단이다. 정원의 화사한 푸름이 안긴다. 그 곁으로 행랑채의 전경이 솟을대문까지 이어진다. 동쪽으로는 안채의 돌담이다. 곳간인 토지광도 보인다. 여닫이가 일반적이나 우화정은 조금 다르다. 판자를 위에서 아래로 차례차례 끼워 문을 닫는다. 도둑을 방지하는 데 유리하다. 서쪽은 사랑채의 툇마루다. 기둥과 서까래가 격자의 문양을 그리며 도열한다. 낡은 마루도 탐스럽다. 그 너머의 화계 또한 먼발치에서 시선을 끈다.
현판도 흥미롭다. 안쪽에는 고택을 아우르는 ‘우화정(雨花亭)’이다. 꽃비가 내리는 집이다. 곱디고운 이름이다. 글씨 또한 예사롭지 않다. 영조 때 문신 자하 신위(申緯)가 썼다. 그는 회화와 서예에 능했다. 조선 3대 묵죽화가로 유명하다. 사운고택에 머물때 뜰 앞에 벚나무가 있었는데 벚꽃 잎이 마치 빗방울처럼 흩날렸다. 그 풍경을 보고 붙인 이름이다.
바깥으로 나오면 또 한 번의 반전이다. 이번에는 수루(睡樓)라 적혔다. 풀이하면 낮잠 자는 집이다. 꽃비와 낮잠의 기묘한 대비는 누마루 아래에 쓰인 천하태평(天下太平)으로 귀결한다. 냇돌로 쌓은 회벽 위에 기와로 써 넣은 글씨다. 글자 사이에는 건곤감리의 팔괘 무늬를 새겼다. 천하의 태평이 세상과 조우한다. 생의 멋을 아는 이의 기상이다. 눈을 감고 때 아닌 낮잠을 청해봄 직도하다.
안채는 누마루 옆으로 난 중문 너머다. 사랑채의 서쪽에도 문이 있지만 누마루 옆이 주 출입구다. 안으로 걸음을 내기에 앞서 안채 모서리의 붉은 장미들이 시선을 유도한다. 조환웅씨가 심었다. 토종 장미와 대비를 이룬다. 곧 ‘ㄱ’자형의 안채가 모습을 드러낸다. 대청마루를 중심으로 안방과 부엌 등이다.
윗방은 서쪽 바깥으로 나가는 복합문을 뒀다. 장독과 텃밭으로 쉬이 오간다.
한글 요리책 <음식방문>에 반가의 상차림 69가지 조리법 담겨
안채 서쪽에는 축대 위에 장독대가 가지런하다. 항아리들은 제몸에 깊은 맛을 품어 익힌다. 병풍처럼 산을 향해 오르는 돌담마저 곱다. 그저 어느 집안에나 익는 풍경이려니 하지만 사운고택에서는 조금 더 특별하다. 대대로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전수하던 요리의 비법이 있었다. <음식방문(飮食方文)>이라는 한글 음식 조리서는 숙부인 전의 이씨(1867∼1938)가 써서 기록으로 남긴 요리책이다. 술·떡·김치 등 69가지의 조리법이 적혀 있다. 충청도 반가의 상차림을 엿볼 수 있다.
안채에서는 안사랑채도 길이 열린다. 다만 광채가 있어 경계 역할을 한다. 안사랑채는 앞서 말했듯이 행랑채 동쪽의 얼방문으로도 곧바로 들어갈 수 있다. 정면 네 칸, 측면 두 칸의 규모다. 곳간 열쇠를 넘긴 만종부가 머물던 공간이다. 집안의 여자 손님을 맞는 접객 장소로도 쓰였다. 예전에는 대문 쪽으로는 초가도 있었다.
바깥에서 보면 기와집이 아니라 초가가 먼저 눈에 들어온다.
가세를 자랑하기보다 몸을 낮춰 마을 사람과 어울려 지내고자 하는 마음이다. 안채에는 조환웅 씨가 조모를 기려 건 보현당(寶賢堂)이라는 현판이 있는데 이를 증명한다.
우화정은 6·25전쟁 당시 인민군 사령부로 쓰였으나 화를 당하지 않았다. 안주인이 마을 사람들에게 덕을 베푼 까닭이다.
안사랑의 마당에서는 뒷산의 소나무와 한옥의 어울림이 가장 아름답다. 괜스럽지 않다.
우화정의 모습은 본채 안에만 머물지 않는다. 대문 밖으로 나오면 행랑채 앞개울 건너에 연못이 있다. 원래 청한루라는 정자가 있었다. 다시 마을로 돌아가는 길에는 길가에 연잎이 싱그럽다. 7월에는 붉은빛의 연꽃을 피워 올리겠다. 작은 개울을 가로질러 들마루를 놓은 쉼터도 있다. 신발을 벗고 쉬어가기에 좋다.
조환웅 씨는 우화정 일대를 수목원으로 꾸밀 계획을 가지고 있다. 더 많은 이들이 조금 더 편안하게 고택의 여유를 느꼈으면 하는 바람이다. 돌아보니 사운고택(士雲古宅)이란 이름이 새삼스레 살갑게 느껴진다.
글과 사진·박상준(여행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