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많고 많은 음식 중에 탕평채만큼 의미심장한 이름을 가진 것이 또 있을까. 음식 이름은 대개 재료명과 요리방법으로 이루어지게 마련인데 탕평채는 그 유래가 사색당쟁이라는 역사적인 사건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조선 중기의 영조는 붕당 간의 첨예한 대립과 정쟁을 해소하기 위해 인재를 고루 평등하게 등용하는 탕평책을 실시하였다. 그 무렵 어느날 수라상에 나온 청포묵과 갖은 재료들이 섞인 모양새가 탕평을 상징한다 하여 그렇게 이름을 붙였다는 것이다.
19세기 후반에 나온 <명물기략(名物紀略)>에는 “사색인(四色人)의 탕평을 기대하여 녹두묵과 여러 재료를 섞어 만든 음식을 탕평채라 한다”고 했다. 탕평은 <서경>에 나오는 ‘무편무당 왕도탕탕(無偏無黨 王道蕩蕩) 무당무편 왕도평평(無黨無偏 王道平平)’이라는 글귀에서 유래한 것으로 싸움이나 시비, 논쟁에서 어느 쪽에도 치우침이 없이 공평함을 뜻한다고 한다.
탕평채에 들어가는 다양한 재료의 색은 각 붕당을 상징한다는데, 김의 검은색은 북인을, 미나리의 푸른색은 동인을, 청포묵의 흰색은 서인을, 고기의 붉은색은 남인을 의미한다고 한다. 한낱 묵 요리가 탕평채 같은 예사롭지 않은 칭호를 갖게 된 배경에는 화합에 대한 염원이 있었던 것이다.
영조는 당쟁의 여파로 자신의 아들을 뒤주에 가둬 죽음에 이르게하는 비극을 겪기도 했는데 그가 바로 유명한 사도세자다. 탕평을 위해 영조는 사람을 쓰는 데 있어서도 상호 견제가 가능한 자리에 각각 다른 당파의 인물을 배치하는 쌍거호대(雙擧互對)의 방식을 취했고 후에는 아예 당색은 불문에 부치고 재능에 따라 인재를 등용하는 유재시용(惟才是用)의 원칙을 지켰다.
탕평채는 1700년대 말의 문헌인 <경도잡지(京都雜志)>와 <고사십이집(攷事十二集)>에 처음으로 등장한다. 탕평채라는 이름의 작명자에 대해서는 이설도 있다. 19세기 중반의 <송남잡지(松南雜識)>는 훗날 영조 밑에서 좌의정을 지내는 “송인명(宋寅明)이 젊을 때 저자 앞을 지나가면서 골동채 파는 소리를 듣고 깨달은 바가 있어 사색을 섞는 일을 탕평 사업으로 삼고자 이 나물을 탕평채라 하였다”고 했다.
비슷한 시기의 <명물기략(名物紀略)>에는 “정조 때 사색인의 탕평을 바라는 마음에서 갖은 재료를 고루 섞은 묵나물에 탕평채란 이름을 붙였다”고 했다. 주장은 엇갈려도 탕평채라는 명칭이 그 시절의 탕평책에서 비롯된 것만큼은 틀림없는 사실로 짐작된다. 탕평채라는 칭호는 그 후에 나온 <임원십육지> <동국세시기> <규곤요람> 등의 문헌에 탄평채(坦平菜), 탕평채방(蕩平菜方), 탕평채 청포(蕩平菜 淸泡), 녹두묵 탄평채(坦平菜), 묵나물, 묵채, 묵청포, 묵초나물 등의 다양한 변형으로 등장한다.
궁중 연회를 기록한 <진찬의궤(進饌儀軌)>에는 청포채(淸泡菜)라는 이름으로 나와 있다. 이제 탕평채는 웬만한 한식 상에는 빠지지 않고 오를 정도로 흔한 음식이 되었지만 그 의미를 되새기며 먹는 사람은 드물다. 모처럼 가족이 모이는 자리에 탕평채를 옛날식으로 함께 해 먹으며 가정과 세상의 화합을 기원해보는 것은 어떨까.
19세기 말의 <시의전서>에 나오는 조리법은 다음과 같다. “묵은 가늘게 채치고 숙주와 미나리는 데쳐서 잘라 양념하여 무친다. 쇠고기는 다져서 볶아 넣고 숙육(수육)은 채쳐 넣고 김은 부수어 넣는다. 깨소금, 고춧가루, 기름, 초를 합하여 지령(간장)에 간을 맞춰서 묵과 한데 무쳐 담고, 위에 김을 부숴 얹고 깨소금과 고춧가루를 뿌린다.”
글·예종석(한양대 경영학부 교수·음식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