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이야 누구나 즐길 수 있는 취미생활이지만, 바둑 속에 사람사는 이치가 깃들어 있다. “이기려고 집착하지 말라” “작은 것을 탐내다가 큰 것을 잃는다” 등 바둑의 여러 격언은 세상을 살아가는 데도 깨우침을 주는 유용한 격언이다. 그래서 퇴계 선생도 세상에 나선 사람의 말이나 행동 하나하나가 얼마나 중요한 결과를 초래하는지를 바둑에 비유하여 “헛수를 한 번 두면 전판이 무너진다”고 하여 말과 행동에 신중하도록 깊이 경계했다.
바둑판 위에 돌을 놓을 때처럼 세상일에는 큰 일과 작은 일, 급한 일과 중요한 일, 먼저 할 일과 나중 할 일을 끊임없이 판단해야 한다. 큰 일에 몰두하느라 작은 일을 소홀히 하면, 거대한 핵발전소도 작은 부품 하나 때문에 멈추어 서게 된다. 급한 일을 쫓아다니느라 중요한 일을 잊고 있다 보면, 방임했던 자식들이 탈선하거나 가정이 무너지기도 한다.
조선왕조는 예절과 의리의 도덕적 질서를 사회적 이상으로 확인하였던 것 같다. 조선 사회가 근본의 도덕만 강조하다가 폐단이 누적되었을 때 현실의 모순을 해결하기 위한 대책을 가장 선명하게 제시하였던 선구적 인물이 율곡이다. 그는 자신의 시대를 백성의 고통을 구제하기 위해 과감한 변혁이 요구되는 경장(更張)의 시대로 인식하고, 현실의 폐단과 불합리한 제도의 개혁을 위해 구체적 실무의 긴급함을 역설하였다. 여기서 그는 변혁의 조건으로 ‘시기적 적합성’(時宜)과 ‘현실적 효용성’(實功)을 요구하고 있다. 시기가 적절하지 않은 개혁이나 효용성이 확보되지 않는 개혁은 그 개혁의 정당성을 상실하지 않을 수 없다.
한 사회의 이상이 아무리 훌륭해도 그 이상을 뒷받침하는 현실의 구체적 대책이 없다면, 정밀한 눈금이 없는 멍텅구리 저울처럼 공허한 구호에 그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다산 정약용은 정치의 시급한 과제로 ‘나라의 법률이 존중받아 지켜지고’ ‘백성의 생활이 소중하게 보호될 것’을 강조하였다.
정치 무대 위에서는 제각기 자기가 옳다는 주장으로 시끄러운데 법은 힘없는 백성만 지키고 있으며, 거리에는 직장도 없이 헤매는 청년들이 넘치고 있다면, 그것은 사회 구석구석에 파고든 병을 찾아내어 치료하지는 않고 원론적인 건강법만 떠들고 있는 모습으로 비칠 수도 있다.
현실의 시급한 문제는 누구나 쉽게 알 수 있고, 적절한 대책을 제시하기만 하면 모두가 공감할 수 있다. 그래도 병을 정확하게 진단하고 올바른 처방으로 환자를 치료하는 명의가 드물듯이, 현실의 폐단과 모순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올바른 대책을 제시하는 일이 쉽지만은 않은가보다. ‘시기적 적합성’과 ‘현실적 효용성’을 제대로 확보하는 개혁의 대책을 찾아내는 데는 탁월한 안목과 역량을 갖추어야 가능하다는 이야기다.
또 하나 중요한 문제는 어느 시대 어느 사회에서나 현실의 시급한 일과 근본적인 중대한 일이 분리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마치 나무에 꽃이 아름답게 피고 풍성한 열매가 맺는 가지 끝이 우리의 시선을 강력하게 끌고 있지만, 그 가지 끝의 꽃이나 열매가 병들지 않고 충실하려면 눈에 보이지 않는 땅속의 나무뿌리가 건강해야만 가능하다. 한 사람에서도 건강한 정신과 건강한 신체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듯이, 우리 사회의 시급한 문제들에 대한 관심은 동시에 근원적 문제들과 연결되어 있다는 인식이 필요하다.
시급한 현실문제 해결에 몰두하다가 근본의 문제를 놓쳐버리면, 마치 조선왕조에서 근본의 도덕에 몰입하다가 시급한 현실을 외면하였던 병통과 같은 과오에 빠져들 수 있다. 그래서 우리 속담에도 “손톱 밑에 가시 드는 줄은 알아도, 염통 밑에 쉬 스는 줄은 모른다”고 하였으니 작은 일, 급한 일, 먼저 할 일을 할 때에는 항상 큰일, 중요한 일, 나중 할 일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글·금장태(서울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