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에는 초기부터 지폐인 저화(楮貨)와 세종대에 만들어진 조선통보를 사용하였다. 또한 세조대에는 유사시에 화살촉으로 사용하고 평화 시에는 화폐로 사용하는 유엽전(柳葉錢)을 법화로 주조해 유통시키기도 하였으나, 화폐를 사용할 수 있는 사회·경제적 여건이 형성되지 못했기 때문에 쌀이나 포(布)가 화폐의 주요 기능을 했다. 저화나 동전은 화폐로서 큰 기능을 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조선 후기부터 이러한 흐름에 변화가 찾아왔다. 무엇보다 두 차례의 전란 이후에 찾아온 조선의 사회·경제적 변화들이 화폐 유통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갖게 했다. 전란의 후유증을 조기에 극복하고, 국가 재건의 기틀을 다지기 위한 대동법·호포법·주전론(鑄錢論) 등의 정책이 제기되었는데, 이들 정책은 농업 중심의 조선 사회가 점차 상공업 사회로 지향해감을 보여주고 있다. 화폐의 주조를 주장하는 주전론은 생산력의 발달과 국제교역의 성장, 대동법의 실시로 인해 조세를 돈으로 납부하는 경향이 커짐에 따라 그 요구가 확대되었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에서 1678년(숙종 4) 숙종은 대신과 비변사의 여러 신하들이 모인 자리에서 화폐의 주조에 대해 의견을 나누었다.
먼저 화폐는 천하에 통행(通行)하는 재화인데 오직 우리나라에서 행해지지 못했던 것은 동전이 토산(土産)이 아니라는 점과 중국과는 달리 화폐를 유통시키는 분위기가 저조했음이 지적되었다.
이어 허적·권대운 등의 신하들이 화폐의 시행을 적극 건의하고, 신하 대부분이 화폐 유통의 필요성에 공감하자 숙종은 드디어 결단을 내렸다. 호조·상평청·진휼청·어영청·훈련도감 등의 기관에 명하여 상평통보를 주조하게 한 것이다. 돈 4백문(文)을 은 1냥의 값으로 정하여 시중에 유통하게 하였으니, 은 한 냥은 동전(상평통보)의 4배의 가치를 가지게 되는 셈이었다.
지금은 한국조폐공사에서만 화폐를 만들지만, 조선시대에는 여러 관청에서 화폐를 주조하였다. 상평통보는 나무처럼 생긴 주전틀(돈을 만드는 틀)에서 동전을 만들어 떼어내는 방식을 취했는데, ‘엽전’이라는 용어도 동전이 주전틀에 나뭇잎처럼 달려 있었던 것에서 유래한 것이다.
상평통보가 만들어지면서 조선 사회는 본격적인 화폐 유통의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조선시대의 화폐 단위인 1문은 1푼이라고도 했으며, 10푼이 1전, 10전이 1냥이 되었다. 10냥은 1관으로서 관이 최고 화폐단위였다. 조선 후기 1냥의 구매력은 쌀값 등과 환산해볼 때 대략 4만~5만원 정도의 가치를 지닌다. 따라서 최소의 단위인 1푼은 지금의 400원 정도 되는 셈이다. 동냥하는 사람들이 하는 ‘한푼 줍쇼’라는 말은 조선의 화폐 단위에서 비롯된 것이다.
상평통보 유통 초기에 백성들은 조그만 동전으로 쌀이나 옷을 과연 살 수 있을지를 두려워하여 그 유통에 소극적이었다. 이에 정부에서는 동전을 가져오는 자에게 직접 명목 가치에 해당하는 현물을 바꾸어 주는가 하면, 중앙 관리를 각 지방에 파견하여 동전 사용을 독려하기도 하였다. 또한 정부가 직영하는 시범 주점과 음식점을 설치하여 화폐 유통의 편리함을 널리 홍보하였으며, 세금을 화폐로 받고, 한성부·의금부 등에서는 죄인의 보석금도 현물 대신에 동전으로 받으면서 화폐 유통을 촉진시켜 나갔다.
숙종대에 상평통보가 전국적으로 유통되게 된 배경에는 국가의 화폐 유통에 대한 의지와 함께 조선 후기 농업 사회가 서서히 상공업 사회로 전환하는 시대적 상황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한편 국가에서도 재원 확보 방안으로서 상업과 수공업의 중요성을 인식하였고, 화폐의 유통은 동전의 재료가 되는 광산 개발과 상업의 발달을 촉진하는 효과도 가져왔다. 그런데 18세기에 이르러 화폐를 집에 보관만 하면서 발생하는 화폐의 품귀 현상인 전황(錢荒) 이 발생하여 화폐 가치가 상승하는 현상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이것은 양반 관료나, 지주나 대상인들이 화폐를 고리대 수단으로 활용하거나 축적하였기 때문으로 ‘부익부 빈익빈’ 현상을 초래하는 원인이 되었다.
글·신병주(건국대 사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