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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이후 우리의 대중교통수단은 숨가쁘게 발전해 왔다. 승합 마차와 인력거가 굼벵이처럼 굴러다니던 도로가 완전 1일 생활권으로 바뀌었다. ‘경부고속도로’ 혁명에 이어 지금은 고속철도가 시속 300㎞로 달리는 세상이 됐다. 대중교통은 우리의 삶을 바꾼 가장 대표적인 것 중 하나다.
광복 후 서울 시내 교통은 시대에 역행하는 기현상이 나타났다. 이미 도시 교통에서 도태된 지 오래인 승합 마차와 인력거가 여객 수송기관으로 다시 등장한 것이다. 인구는 하루가 다르게 증가하는데 전차의 수송력은 격감하고 다른 교통수단이 없었으므로 서울 시민은 먼 거리도 걷는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교통상황에서 부산물로 등장한 승합 마차가 서울 시내를 ‘버젓이’ 운행했던 것이다. 1947년 6월 미 군정청은 승합 마차의 서울 시내 운행을 허가했다. 처음에는 200대가 운행했으나 1948년 말에는 143대로 줄었다. 그러나 이용자는 날로 증가해 1일 평균 3만 명을 수송했으니 하루에 대당 200명꼴의 승객이 이 ‘시대착오적’ 운송수단을 이용했던 셈이다.
광복 이후 활기를 띤 교통수단은 택시와 승합 마차·인력거였다. 택시는 1947년 말 현재 전국에 81개 사업자가 1,090대를 면허받아 운행했다. 그 중 54개 업자, 949대가 서울에서 운행하고 있었으니 95% 이상이 서울에 편재돼 있었다.
최초의 국산 차량인 ‘시발’은 6·25 이후 미군이 불하한 군용 차량의 섀시에 드럼통을 두드려 펴 차체를 만든 자동차다. 주로 택시로 이용되었으며 고급 계층의 자가용으로도 쓰였다. 시발의 생산 방식은 수공업 수준이었지만 외형적으로는 공장을 설립해 전문 자동차 메이커의 형태를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무리한 공장 확장과 5·16쿠데타 등이 겹쳐 자금 지원을 받지 못한데다 1962년 일본에서 수입한 부품을 조립해 생산한 승용차 ‘새나라’가 판매되자 큰 타격을 입게 되었다. 시발은 1963년까지 3,000여 대가 생산되었으며 우리나라 교통과 산업 발전의 주춧돌 역할을 했다.
해방 직후 가장 중요한 대중교통수단은 역시 철도였다. 해방의 기쁨이 채 가시기도 전에 국토가 분단되고 철도마저 갈라졌다. 철도는 남북 분단의 비극을 몸으로 말해주는 하나의 상징물이다.
당시 남한의 철도는 총 연장 3,378㎞, 영업거리 2,642㎞, 기관차 488대, 객차 1,280량, 화차 8,424량, 역 300개, 종업원 5만5,960명이었다. 해방 전에 비해 모든 면에서 반 정도로 축소된 것이다. 이 같은 어려운 조건 하에서도 철도는 1946년 경부선에 특급 ‘해방자호’를 운행하는 등 조직을 정비하고 시설과 장비를 확충하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다.
[B]KTX 개통으로 지상 교통혁명 완성[/B]
그러나 6·25를 거치며 철도는 또다시 처절한 피해를 입었다. 철도 당국은 이에 굴하지 않고 전후 복구와 재건에 주력해 철도를 명실공히 ‘민족의 동맥’으로 부활시켰다. 1959년 8월 처음으로 국산 객차를 제작하는 데 성공했으며, 1961년 7월에는 디젤 기관차를 도입해 오늘날과 같은 철도 수송 체계의 기반을 확립할 수 있었다.
1960년대 들어 경제개발계획에 따라 사회간접자본 확충의 필요성이 증대되자 산업철도 건설과 지역사회 개발에 막대한 투자가 이뤄지게 되었다. 정부는 철도를 독립채산에 의해 합리적으로 운영하고 좀 더 전문적인 공기업으로 발전시키기 위해 1963년 9월1일 철도청을 발족했다. 1973년과 1974년 산업선인 중앙선과 태백선 전철화, 1974년 수도권 전철 개통은 도시전철 교통시대의 장을 열어 교통수단으로서 철도의 중요성을 확립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1974년 새마을호가 서울~부산 간을 4시간50분대에 주파함으로써 전국을 1일 생활권으로 묶었다. 새로운 패턴의 국민생활이 출현한 것이다. 1970년대 후반부터는 철도 기술의 해외 진출과 동력차의 국산화 등을 이룩했다.
시내버스가 시민의 교통기관으로 본격 부각된 것은 1949년 운수사업을 민간에 개방한 이후부터다. 1949년 8월31일 서울시는 처음으로 시내버스 운수업자를 지정하고 105대의 버스를 운행하게 했다.
1968년 경인고속도로 개통(4차선, 연장 29.5km)은 한국 교통운송사의 기념비라고 할 만한 ‘사건’이었다. 고속도로 개통과 더불어 고속버스가 대중교통수단의 ‘명물’로 등장했다.
경인고속도로에 이어 경부고속도로·호남고속도로·영동고속도로·동해고속도로·중부고속도로·88올림픽고속도로·구마고속도로 등이 잇따라 개통됐다. 고속도로는 현재까지도 계속 건설되어 전국을 촘촘하게 연결하고 있다. 항공운송의 대중화와 고속철도의 개통, 승용차의 증대 등으로 비중은 줄어들었지만 좁은 국토의 특성상 고속버스는 여전히 주요 대중교통수단으로서 무시할 수 없는 몫을 수행하고 있다.
한국 최초의 지하철은 1974년 8월15일 개통된 서울 지하철 1호선 서울역~청량리 7.8km 구간이다. 세계 최초 지하철 개통 후 약 110년 만의 일이었다. 현재 서울 지하철은 8개 노선에 263개 역사와 전동차 3,508량, 노선거리 286.9㎞, 연간 수송인원 22억 명을 자랑한다. 첫 개통 당시와 비교해 운행거리는 약 36배, 역사 수는 29배로 늘어났다. 하루 운행 횟수도 296차례에서 4,297차례로 15배, 하루 수송 인원은 최초 23만 명에서 50배 가까이 늘었다.
서울~부산 408.5㎞ 거리를 2시간40분, 서울~목포 407.6㎞를 3시간 만에 주파, 300㎞의 속도혁명으로 불리는 한국고속철도(KTX)는 지난 4월1일 개통 1주년을 맞았다. KTX는 전국을 3시간 생활권으로 묶는 생활혁명을 가져옴과 동시에 교통문화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보여줬다. 교통전문가들은 KTX는 개통 1년 만에 ‘정착단계’에 진입한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
개통 1년 만에 이용객 2,700만 명을 넘어선 KTX는 정차역의 상권과 교통망에 큰 변화를 몰고 왔다. 또 기업도시 건설을 촉진하는 등 지방경제 활성화에 도움을 주고, 산업시설의 탈(脫)수도권화를 촉진하는 등 국토 균형발전을 앞당기고 있다. KTX는 지난해 하루 평균 7만4,000여 명의 승객이 이용했으며, 하루 평균 영업수입은 21억5,700만 원에 달했다. 승합 마차와 인력거가 굼벵이처럼 지나다니던 국토가 ‘1일 생활권’으로 탈바꿈한 것이다. [RIGHT]임천우 객원기자[/R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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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공감누리집(gonggam.korea.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