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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일지>는 1947년 국사원에서 첫 출간된 이래 지금까지 수많은 사람이 읽고 있는 전 국민의 필독서라고 할 수 있다. 백범의 파란만장했던 생애가 그러했듯 이 책에는 백범의 지고지순한 민족애와 헌신성이 곳곳에 배어 있다. 그래서 <백범일지>는 자신의 치적은 포장하고 허물과 과오는 덮으려는 숱한 명망가들의 그 흔한 자서전과는 감히 견줄 수 없다. 다시 말하면 <백범일지>는 자서전이되 귀한 보석 같은 존재다.
<백범일지>를 보면 그가 태어날 때 고승은커녕 땡초 한 명 사립문을 들어섰다는 이야기도 없다. 그만큼 평범한 출생이었다. 위인전이라면 으레 등장하는 후세에 교훈이 될 만한 어릴적 일화도 들어 있지 않다.
이 책에는 상하이(上海)와 충칭(重慶) 임시정부 시절 그가 치열하게 벌였던 독립운동의 시기, 거사의 주인공인 이봉창 의사와 윤봉길 의사에 대한 언급이 오히려 짧은 편이다. 대신 늘 부족했던 독립운동 자금을 구하는 과정의 고생담, 이리저리 피신을 다니며 겪었던 우여곡절이 더 많이 차지한다. 스스로 범부를 자처하며 그 뜻을 살려 아호를 백범(白凡)으로 정했던 그의 인품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대목이다. 역설적으로 <백범 일지>는 바로 이런 점 때문에 오늘날에도 수많은 국민이 여전히 감동을 느끼며 수시로 펼쳐드는 책이 되고 있다.
<백범일지>는 김구 선생이 만리타국 중국에서 변변한 자료나 보조원 하나 없이 순전히 과거의 기억을 더듬어 일정 기간 집중적으로 집필한 것이다. 따라서 애초 원본에는 목차도 제대로 정리되어 있지 않고 서술 내용 중 간단한 시기조차 틀린 경우가 많았다. 인명과 지명도 착오가 적지 않았다. 가령 원본 <백범일지>에서는 선생이 일본인 밀정을 살해하고 사형집행을 당할 위기에 놓인 것과 관련해 ‘7월27일 사형집행 시간이 반일(半日)밖에 남아 있지 않다’고 했다가 다시 ‘8월26일 고종이 전화로 사형집행 정지를 지시했다’고 하여 내용상 모순이 발생한다. 이번 <백범일지> 판본 주해자인 사학자 도진순 교수는 자료를 추적해 음력 8월26일(양력 10월2일) 조속한 처리를 촉구하는 인천감리서의 요구에 대해 법부에서 왕의 명령을 받아 지시를 내린다는 전보를 찾아 이를 바로잡았다.
이런 식으로 주해자는 백범의 친필 원본은 물론 등사본과 필사본, 그동안 출판됐던 여러 저본을 일일이 면밀하게 검토하고 대조해 착오를 수정하고 모자란 점을 보완한 것이다. 이를 위해 주해자는 사전류는 물론 고전, 규장각 자료 같은 고문서, 수많은 회고록, 일본·중국 등 해외의 임시정부 관계 자료까지 두루 활용했다. 그만큼 이번 <백범일지> 판본은 주해자가 본격적인 ‘원전 비평’을 통해 가장 정본에 가깝게 만든 새로운 작품이어서 가치를 더하고 있다. 광복된 지 벌써 60년이다. 그렇지만 백범 선생이 꿈꾸던 ‘완전한 자주독립국’은 아직도 우리 민족의 과제로 남아 있다. 이런 시기에 백범 선생의 일대기를 읽으며 선생의 마음과 실천을 되새기는 것은 분명 가치 있는 일이다.
[RIGHT]최영재 기자[/R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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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공감누리집(gonggam.korea.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