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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미리를 처음 만난 것은 1995년 일본 마쓰에(松江)에서 열린 한·일 작가회담에서였다. 평론가 가라타니 고진, 소설가 시마다 마사히코 등과 함께 일본쪽 작가로 참가한 유미리의 첫인상은 고고해 보일 정도로 낯가림이 심하다는 것이었다.
행사장 안과 밖에서 그는 그다지 말이 없었는데, 자기 차례가 되어 짧게 발언한 말 중 기억에 남는 것이 있다. 한국어를 거의 모르는 자신에게 한국어란 싸움 또는 비밀의 이미지를 수반해 떠오른다는 말이었다. 어린 시절 부모님이 한국어를 사용한 경우는 언성을 높여가며 말다툼을 벌일 때 혹은 아이들에게는 비밀로 해야 할 무언가 은밀한 얘기를 나눌 때뿐이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단지 한국어에 관한 이야기였을 뿐이지만, 범위를 더 넓혀 본다면 한국이라는 나라와 한민족이라는 겨레를 대하는 유미리의 태도가 거기에 투영돼 있는 것 같다는 인상을 받았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때의 한국어에 대한 발언 때문에 유미리에 대해 ‘편견’을 지녔던 것은 아니다. 아쿠다가와상 수상작인 <가족 시네마>와 그 이전의 출세작인 <풀하우스>를 비롯한 그의 초기 자전적 소설들은 재일 한국인 가족의 붕괴와 해체를 실감나게 그리고 있지만, 거기에 재일 한국(조선)인들이 민족 차원에서 겪는 고통과 슬픔에 대한 인식은 별반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러나 새로 나온 두 권짜리 장편소설 <8월의 저편>(김난주 옮김, 동아일보사 펴냄)은 유미리의 그간의 작품세계나 신상발언과는 사뭇 다른 면모를 보여주어 주목할 만하다.
소설은 경남 밀양 출신인 자신의 외할아버지 이우철을 모델로 삼은 작품으로, 8·15해방을 전후한 우리 민족의 현실을 치밀하게 다루고 있다. 해방 이전의 민족 현실이란 창씨개명과 군위안부 동원, 의열단의 항일무장투쟁 등으로 대표할 만하고, 해방 이후의 그것은 한국전쟁을 정점으로 하는 좌우익의 대립과 갈등을 핵심으로 삼게 된다.
우철과 그의 열두 살 어린 남동생 우근은 둘 다 올림픽 마라톤 우승을 넘볼 정도로 뛰어난 장거리 육상선수들이었다. 그러나 역사의 격랑에 휩싸인 둘에게 올림픽 출전의 꿈은 좌절되고 만다. 우철은 세계대전 때문에 1940년 런던올림픽에 출전하지 못하고, 우근은 좌익 학생운동을 이끌다 결국 비명횡사하고 마는 것이다. 게다가 우근을 짝사랑하던 동네 처녀 영희는 군위안부로 동원되었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결국 일본으로 밀항한 우철이 고향 밀양의 옛 이름인 ‘미리’를 외손녀의 이름으로 택하고, 그 미리가 우근과 영희의 영혼결혼식에 참례하는 결말은 그리움과 희망의 이름으로 민족사의 비극을 뛰어넘으려는 작가의 안간힘을 보여주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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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공감누리집(gonggam.korea.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