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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광복은 한국 영화계에도 희망의 시작이었다.
1948년 신경균 감독은 <새로운 맹서>를 연출했다. 촬영은 일본에서 본격적인 카메라 수업을 받고 돌아온 김학성이 맡았고, 여주인공은 최은희였다. <새로운 맹서>는 작품의 완성도가 높고 흥행에서도 성공했다.
6·25 이후 영화계에는 또 한번 변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국산 영화 제작 편수가 크게 늘어났고, 관객 또한 영화관으로 몰려들어 전후 시절의 고단함을 잊으려고 했다. 제작사도 71개로 늘어났고 동란의 초토 위에 극장이 대폭 늘어나는 놀라운 현상이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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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놀라운 현상’을 몰고온 것은 이규환 감독의 <춘향전>이었다. 이 영화는 당시 서울 국도극장에서 개봉돼 엄청난 관객을 동원했다. 한국영화계 중흥의 이정표 역할을 한 것이다. 또한 신상옥과 홍성기 감독은 멜로 영화의 양대산맥을 이루면서 신상옥-최은희, 홍성기-김지미 콤비의 제작 열기가 불붙기도 했다.
1960년대 들어 인기를 누렸던 멜로 영화의 그 대표적 작품으로 정소영 감독의 <미워도 다시 한번>(1968)을 들 수 있다.
이와 함께 엄앵란·김지미·고은아의 트로이카 시대가 열리면서 한국영화는 또 한번 관객들을 극장으로 유혹했다.
1970년대 들어 표현의 자유를 침해당한 시대적 여건으로 인해 우리 영화는 폭 넓은 제작 기회를 갖지 못한 채 지나치게 소비적이고 상업적인 흐름으로 진행되어 갔다. 이장호 감독의 <별들의 고향>(1974)에 이어 홍수처럼 밀려나온 ‘호스티스 영화’들이 그것이다.
[SET_IMAGE]4,original,left[/SET_IMAGE]1980년대의 정서적 풍요와 의식구조의 다양화는 우리 영화의 다양하고 대담한 스토리 전개와 화면 구성을 가능하게 했다. 이두용은 <피막> <물레야 물레야> <뽕> <업> 등 토속적 소재들을 예술적으로 잘 표현했다. 1983년 <꼬방동네 사람들>로 데뷔한 배창호 감독 역시 <깊고 푸른 밤> 등 여러 작품에서 관객 동원에 성공하며 한국영화 최고의 흥행감독으로 활동했다.
1990년대 중반부터 대기업의 영화업 진출이 가시적으로 나타났다. 이는 한국 영화계의 활력소가 됐다. 1993년 임권택 감독의 <서편제>는 그의 영상미학적 시각과 함께 우리 정서의 깊은 모습인 한(恨)을 형상화해 관객들에게 크게 어필한 것으로 기록됐다. 1980년대 말부터 활동하기 시작한 정지영·박광수 감독 등은 상상력의 빈곤함이 문제로 지적되던 한국영화에 새로운 전환점을 마련한 선봉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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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영화 <쉬리>가 가져온 한국영화의 대폭발[/B]
1990년대는 영화계의 대변혁기에 해당한다. 제2의 영화 전성기가 온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한국영화 흥행 기록이 연이어 갱신되었으며, 우리 영화에 대한 국제 인지도도 높아졌다.
한국영화가 국내 시장에서 할리우드 영화보다 우위에 나서게 된 것은 1999년 2월 개봉된 강제규 감독의 <쉬리>부터였다. 이후 <인정사정 볼 것 없다> <텔 미 썸딩> <주유소 습격사건>과 같은 작품들이 흥행에 성공하면서 한국영화는 상업적으로 안정권에 들어가게 된다. 이런 과정을 거치며 한국영화는 전체적으로 시장이 안정되었고, 그것이 지금의 한국영화 신르네상스를 가져온 원인이다.
[RIGHT]한기홍 객원기자[/R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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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공감누리집(gonggam.korea.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