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년 산재예방에 2조 원 투입
연간 3명 이상 산재사망 발생 법인 과징금
외국인 사망사고 사업주 고용제한 3년으로
중대재해 발생 공공기관장 해임
정부가 사고 없는 일터, 안전 대한민국을 만들기 위해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2024년 산업 현장에서 목숨을 잃은 사람은 모두 589명이다. 50인 미만 소규모 사업장에서 일어난 추락·끼임·부딪힘 같은 재래형 사고가 대부분이다. 하청 노동자가 전체 사고사망자의 48%를 차지하고 외국인 노동자의 사고사망도 지속적으로 늘고 있다. 노동자 1만 명당 사고로 인한 사망자 수를 의미하는 사고사망만인율은 주요 선진국 대비 매우 높은 수준이다. 2024년 0.39퍼밀(‰·1000분의 1)을 기록했는데 일본이 0.12‰, 독일이 0.11‰에 그친다.
이처럼 여전히 ‘산재왕국’이라는 오명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로는 우선 ‘위험의 외주화’가 꼽힌다. 고질적인 다단계 하도급 구조로 원·하청 간 책임이 분명하지 않은 데다 불법하도급으로 비용을 줄이려다보니 현장에서 노동자의 안전관리는 거의 외면받는 상황이다. 특히 노동자들은 여력이 부족한 소규모 사업장에서 노후된 설비와 불안전한 작업 방식으로 위험에 직접적으로 노출돼 있다.
법을 지키지 않더라도 불이익이 적은 상황도 문제다. 안전·보건조치 위반에 대한 처벌이 소액의 벌금, 집행유예 등에 그치고 있어 경제적 불이익은 미미하다. 중대재해처벌법이 시행되고 있지만 양형기준이 없다. 여기에 당사자인 하청 노동자가 의사결정 과정에 참여할 수 없는 환경도 문제로 지적된다.
이에 정부는 9월 15일 ‘노동안전 종합대책’을 발표하고 영세 사업장, 취약 노동자의 사고 예방에 지원을 집중하고 정부·지방자치단체·민간이 함께 예방 주체로 노력하며 사고 예방이 노사 모두에게 이익이 되는 구조로 전환하겠다고 밝혔다. 2030년까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 사고사망만인율인 0.29‰을 달성한다는 목표 아래 안전 사각지대 예방 지원 강화, 안전 주체로서 노사의 역할과 책무 확립, 노동안전 확산을 위한 인프라를 확대하고 안전 예방을 촉진하는 제재수단을 도입하기로 했다.
소규모 사업장 지원 확대해 사각지대 해소
먼저 예방 지원 측면에서 정부는 2026년 2조 723억 원을 투입해 소규모 사업장 등을 대상으로 재정·인력·기술 등을 종합적으로 지원한다. 재정 지원을 확대할 계획인데 433억 원을 들여 10인 미만 사업장의 추락·끼임·부딪힘 등 3대 사고 예방을 위한 지원을 대폭 확대한다. 스마트 안전장비를 갖춰 소규모 사업장의 재해를 예방할 수 있도록 370억 원을 지원한다. 자동화 설비·스마트 안전 장비 등을 통해 현장의 안전성을 제고할 수 있도록 300억 원을 들여 부처협업형 스마트공장 구축도 지원한다.
인공지능(AI) 기술을 산업안전 분야에 적극 도입하는 방안도 추진한다. 다부처 협업 연구개발(R&D)로 안전분야 기술과 제품을 개발하고 현장에서 활용될 수 있도록 한다.
안전관리 역량을 강화하기 위해 인력과 기술도 지원한다. 안전·보건관리자를 선임해야 하는 사업장을 확대하는 한편 소규모 사업장이 밀집한 지역산단 등에서는 공동안전관리자를 채용하도록 하고 업종별 협·단체, 노·사단체 등과 협업해 자부담률을 낮춰 부담을 줄인다. 소규모 사업장에 대해서는 안전·보건관리자 인건비나 민간 위탁 비용을 지원하는 것을 검토하고 현장 경험을 갖춘 인력을 자체 선임할 수 있도록 안전관리자 양성 교육을 지속적으로 실시한다.
사고 비중이 높은 노동자에 대한 지원도 집중적으로 늘린다. 외국인 노동자의 경우 중대재해 발생 사업주에 대한 외국인 고용 제한 요건을 강화한다. 외국인 사망사고 발생 시에는 3년간 고용을 제한하고 중대재해에 해당하는 질병, 부상 등은 1년간 고용 제한을 적용한다. 장기근속 외국인 노동자가 안전교육 강사로 일하거나 다른 노동자에게 멘토링을 제공하는 ‘외국인 안전리더’도 확산해 2026년 200명까지 늘린다. 이를 위해 외국인 안전리더를 적극 활용하는 기업에는 인센티브를 부여하고 안전리더에게는 활동 수당을 지급하는 한편 역량 강화 교육을 제공한다.
배달종사자에 대한 사회안전망 조치도 강화한다. 유상운송보험 가입, 안전교육 의무화 등 사회안전망 조치를 강화하고 야간·택배 작업 등 고위험군 특수형태근로종사자에 대한 건강진단 도입을 추진한다. 산업안전보건법이 적용되는 특수형태근로종사자의 직종과 적용되는 규정을 확대해 보호조치도 강화한다. 고령 노동자에게 친화적인 작업환경이 만들어지도록 문턱을 제거하거나 난간을 설치하는 등 작업환경 개선 비용을 2026년 30억 원 지원한다.
지자체와 민간이 함께하는 촘촘한 예방시스템도 구축한다. 중앙정부 차원에서는 고위험 사업장에 대한 점검과 감독을 확대한다. 감독관 증원을 연계해 감독 물량을 2026년 5만 곳에서 2028년 7만 곳까지 확대하고 신속 대응을 위한 불시 패트롤 점검을 신설한다. 지자체도 30인 미만 사업장에 대해 2028년까지 3만 곳 점검·감독을 목표로 지역별 위험요인에 맞는 예방사업을 운영한다. 1억 원 미만 등 영세 사업장 18만 곳은 역량과 경험이 있는 민간·공공분야 퇴직자, 노사단체 소속 인원 등을 안전지킴이로 2026년 1000명 채용·위촉해 상시 순찰하고 민간재해예방기관을 통해 33만 개 사업장을 집중 지도·관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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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의 작업중지권 행사 요건 완화
노사가 안전 주체로서 역할을 맡고 책무를 확립하는 방안도 추진된다. 우선 도급 계약 시 적정비용으로 충분한 공사기간을 부여해 원청의 예방 의무를 강화한다. 안전관리를 위해 적정한 비용을 보장할 수 있도록 공공·민간 발주자에게 적정 공사비 산정 의무를 부여한다. 또 산업안전 비용을 전가하는 부당특약 설정을 금지하고 과징금 부과수준도 높인다. 민간 공사 설계서에 공사기간 산정 기준을 포함시켜 계약단계에서부터 적정 공사기간을 확보할 수 있도록 유도하는 동시에 건설 공사기간 연장 사유에 폭염 등 기상재해를 추가할 수 있도록 추진한다.
무엇보다 공공기관이 안전에 선도적인 역할을 하도록 한다. 안전경영 원칙에 위반해 중대재해가 발생하면 책임 있는 기관장을 해임할 수 있도록 법적 근거를 마련할 방침이다. 위험작업 시 2인 1조를 운영하고 6개월 미만 신입의 단독 작업이 금지되고 있는지 등을 실태조사해 안전관리 등급 심사에 반영한다. 공공기관 경영평가에 기관장 안전경영 책임을 주요 사항으로 반영하고 산재예방 분야의 배점을 대폭 상향한다.
노동자의 권리를 보장해 산재예방 주체로서 노동자의 역할이 확립되도록 알권리, 참여권리, 피할권리가 강화된다. 사고재발 방지를 위해 사고 경위·원인 등을 담은 재해조사 보고서를 공개하고 500인 이상 사업장부터 안전보건공시제를 도입한다. 노동자가 사업주에게 직접 적극적으로 작업중지 또는 시정조치를 요구할 수 있는 권리를 신설하고 노동자의 작업중지권 행사 요건을 완화해 노동자가 사고를 피할 수 있도록 한다.
산업안전감독관 3000명까지 대폭 증원
노동안전 확산을 위한 인프라는 확대된다. 지자체에 30인 미만 사업장을 대상으로 예방적 감독을 수행할 수 있는 근로감독 권한을 부여하고 가칭 ‘근로감독관 직무 및 사무 위임에 관한 법률’을 제정해 전국적으로 통일된 집행 기준을 마련한다. 감독·수사 강화를 위해 산업안전감독관은 2028년까지 중앙·지자체 약 3000명까지 대폭 증원할 방침이다. 동시에 감독관의 전문성을 확보하기 위해 기술직군 채용을 늘리고 산업안전보건 직무능력 공인인증제를 도입한다. 감독관 역량을 강화할 수 있도록 임용 직후부터 촘촘한 멘토링과 체계적 훈련을 실시하고 경력 단계에 맞춰 현장 중심의 체험·실습형 교육을 강화한다.
안전·보건관리자에 대한 전문성도 제고된다. 현장 경력 정보를 체계적으로 관리해 경력별 직무교육을 실시하고 이수증을 발급할 예정이다. 최신 기술 등에 대한 전문교육이나 고위험 사업장에 종사하는 안전·보건관리자에 대한 특화교육도 실시해 전문성을 키운다. 민간재해예방기관 중 저역량 기관은 컨설팅을 통해 육성을 지원하고 부실 기관에 대해서는 퇴출을 유도한다.
안전 의식·문화를 확산하기 위해서 온라인·모바일 기반 ‘안전일터 신고센터’를 개설·운영한다. 2026년부터는 111억 원을 들여 안전·보건조치 의무 위반, 산재 은폐 등을 신고할 때 파격적으로 보상할 계획이다. 또 산재예방은 노사 공동의 이익인 만큼 경제단체, 업종별 협·단체, 노동계 등과 함께 위험 표지판 부착, 대상·재해유형별 특화 산재예방 활동 등 안전문화 활동을 추진한다.
여신심사, 자본시장 평가에도 중대재해 리스크 반영
신속하고 실효성 있는 경제적 제재도 뒤따른다. 현재 안전·보건조치 위반 시 경제적 불이익은 소액 벌금 등에 그쳐 미미한 수준이다. 그러나 앞으로 중대재해가 반복 발생하면 금전적 제재에 영업정지·인허가 취소 등 조치도 있을 예정이다. 연간 3명 이상 사망사고 발생 시 법인에 대한 과징금을 도입하고 부과된 과징금은 산재예방에 재투자될 수 있도록 ‘산업재해예방보상보험기금’에 편입한다. 건설사 영업정지 요청 요건을 현재 ‘동시 2명 이상 사망’에 ‘연간 다수 사망’을 추가하고 사망자 수에 따라 영업정지 기간을 강화한다. 최근 3년간 영업정지 처분을 2회 받은 뒤에도 다시 영업정지 요청 사유가 발생한 건설사는 등록말소를 요청할 수 있도록 규정이 신설된다.
중대재해가 반복적으로 발생하면 공공입찰 참가를 제한하는 조치도 시행된다. 입찰 참가 제한 요건을 중대재해가 반복적으로 발생하는 경우로 확대하고 입찰 제한 기간도 현행 2년에서 3년으로 늘린다. 시설공사, 물품, 용역 등 공공조달 전 분야에서 낙찰자를 선정할 때도 중대재해 발생 여부에 대한 평가를 강화한다.
여신심사, 자본시장 평가 등에 중대재해 발생 여부가 반영된다. 대출금리·한도·보험료 등에 중대재해 리스크가 확대 반영될 수 있도록 금융권 신용평가 기준 등을 개선하고 중대재해가 반복적으로 발생하면 정책자금 참여도 제한된다. 상장회사에서 중대재해가 발생하거나 중대재해처벌법상 형사판결을 받았을 때 관련 사실을 지체 없이 공시해야 한다. 또 중대재해 관련 사실이 국민연금 등 기관투자자의 투자판단에 고려될 수 있도록 ESG(환경·사회·지배구조) 평가, 스튜어드십 코드에 반영할 방침이다.
중대재해에 대한 사고 조사·수사도 강화된다. 중대재해 예방을 위해 급박한 위험이 있다고 판단되는 경우에 고용노동부 장관이 긴급 작업중지 명령을 할 수 있도록 제도가 신설된다. 양형위원회와 협의해 산업안전보건법의 양형기준을 상향하고 중대재해처벌법 양형기준을 신설하는 일도 추진된다.
고용노동부·대검찰청 간 협의체를 구성해 중대재해가 발생하면 신속히 수사해 송치·기소하고 고용노동부에는 전담 수사조직을 확충한다. 검찰과 경찰에는 중대재해 사건 부장검사 책임 수사제와 산업재해 전담 수사팀을 신설해 신속하고 엄정한 수사가 이뤄질 수 있도록 한다.
김영훈 고용노동부 장관은 9월 15일 브리핑에서 “올해를 산재왕국이라는 오래된 오명을 벗는 원년으로 만들겠다”며 “정부는 노동안전 종합대책에서 즉시 이행 가능한 과제들을 신속히 추진하고 대책의 차질 없는 이행을 위해 입법·예산 과제에 대해 재정 당국·국회와 긴밀히 협의하겠다”고 말했다.
김효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