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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갈하기로 치면 옷감 가운데 세모시 이상 가는 것이 또 있을까? 버들잎같이 하늘거리는 ‘능라’라 하더라도 깨끗함이나 순결함으로 치자면 세모시에 비길 바가 아니리라. 그런 면에서 세모시는 선비 같은 고결함을 간직하고 있다 할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선비가 그러하듯, 저 홀로 칼날 같은 순결함을 자랑하는 모시도 그 뒤에는 서민들의 눈물과 땀이 흠뻑 배어 있다. 그야말로 한(恨) 올 한(一) 올 무르팍에 대고 살갗이 벗겨지도록 비벼 삼아 풀매기를 한 다음 베틀에 얹고, 시름 한 올 세월 한 올 엮어 한 필 두 필 모시를 뽑아내다 보면 어느새 귀밑머리가 모시처럼 새하얗게 세어버리는 것이 우리 여인네들의 삶이었던 것이다.
그러고도 모시란 워낙 까탈스러워 “양지 끝에 보면 모시 안 사 입는다”고 했으니, 풀기가 조금만 떨어져도 온 이음새가 보풀로 일어나 습기 가득 가둔 반움막에서 길쌈을 해야 했다. 이즈음 모시시장이 새벽녘 백열전등 아래 서는 것도 한낮의 햇볕을 피해 습기를 보존함으로써 보풀을 감추기 위한 것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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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우 겨우 모시 한 필 뽑아 번듯하게 옷 한 벌 지어 입어도 빨 때마다 풀을 먹여 다림질해야 하는 등 간수하기는 또 얼마나 힘들던지. 그래서인지 어쩌다 셔츠 한 벌 해 입거나 마지막 길 고이 가시라 수의로나 장만하는 덕에 10년 전만 해도 한산 모시시장에서는 하루에 1,500필씩 팔려나갔으나 이즈음에는 겨우 60~70필이 고작이라고 한다.
“예부터 한산 지방에는 여자가 시집가려면 모시 한 죽(10필)을 짜 가져갔다고 합니다.”
저삼팔읍길쌈놀이 전수자인 홍경자(62) 할머니의 회고다. 예물이 아니었다. 시누이나 동서들의 매운 시집살이 입막음 등으로 사용하기 위해서였다. 요즘 시세로 모시 한 필에 60만~70만 원 하니 쌀 대여섯 가마는 되지만 당시는 겨우 쌀 한 말과 맞바꿨다고 한다. 그럼에도 다른 물건 시세에 비하면 대단한 재산이어서 시집 몰래 친정 부모 생신날 맛깔스러운 반찬 한 가지는 올릴 수 있는 염출도 모시 한 필 파는 것으로 해결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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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시는 올이 가늘수록 비싸고 옷의 태가 난다고 한다. 그래서 유명한 것이 세모시. 보통 9새짜리는 돼야 세모시라고 불리는데, 1새에 80올이니 모두 720가닥이 31cm 정도 되는 폭에 채워지는 셈이다.
어릴 적 “어머니가 짠 모시의 이음새는 안 떨어지는데 왜 나는 자꾸 떨어지는지 모르겠다”고 투정을 부렸다는 홍 할머니는 요즘에 와서야 그 이유를 알 것 같다지만 ‘볕 들자 해 저문다’고, 요즘에는 반자동 베틀까지 등장해 신간은 한결 편해졌으나 그럴수록 어머니의 손길이 그리워진단다. [RIGHT]사진·권태균 / 글·이항복[/R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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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공감누리집(gonggam.korea.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