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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악인 엄홍길 대장(45)에게는 아시아 최초, 그리고 세계 여덟번째 히말라야 8,000m급 고봉 14좌 완등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닌다. 그러나 2005년 5월, 후배 산악인 고(故) 박무택 대원과의 ‘무언의 약속’을 지킨 것은 14좌 완등보다 더 그를 빛나게 만들었다.
박 대원은 지난해 5월18일 대구 계명대 후배와 함께 초모랑마(에베레스트의 티베트 이름)를 등정하고 하산 길에 8,750m에서 탈진으로 숨을 거뒀다. 당시 엄 대장은 비보를 듣고 빈소가 마련된 대구 동산의료원을 찾았다. 그리고 등산로에 있는 박 대원의 시신을 수습해 유골을 가족의 품에 안겨주리라 마음 먹었다.
인간이 동물에 비해 위대한 것 중 하나로 약속을 지킨다는 도덕성을 꼽을 수 있다. 이는 자신이나 남들과의 믿음 속에 싹 트는 것이며, 사회를 원활히 돌아가게 하는 기본 동력 중 하나다. 약속에는 여러 종류가 있다. 서류상의 계약이나 구두(口頭) 약속이 있는가 하면 자신이나 남과의 무언(無言)의 약속이 있다. 무언의 약속을 지키는 것이야말로 인간의 가장 아름다운 모습 중 하나다.
엄 대장은 “그동안 생사고락을 같이하던 박무택 대원의 시신이 사람이 다니는 길에 그대로 방치돼 있는데, 이를 수습하는 것은 나의 당연한 도리”라면서 “결국 이번 사고는 박 대원을 히말라야에 본격적으로 발을 디디게 한 나의 책임이 크고, 개인의 명예를 위한 ‘14+2(8,000m급 고봉 14좌 + 위성봉 2개)’ 등정보다 어떻게든 (무택이를) 데려와야 하는 것이 나에게 맡겨진 일”이라고 이번 일에 나서게 된 이유를 설명했다.
엄 대장과 박 대원은 함께 목숨을 걸었던 아주 특별한 인연이 있다. 둘이 처음 만난 것은 2000년 봄, 칸첸중가(8,586m, 세계 제3위 봉) 원정 때였다. 당시 엄 대장과 박 대원은 칸첸중가를 셰르파의 도움 없이 4전5기(四顚五起) 끝에 등정했다. 의학계에서는 8,500m 이상에서 무산소 등정은 불가능하다는 것이 통설이었으나, 당시 두 사람은 죽음의 지대에서 함께 비부악(bivouac: 장비 없이 야외에서 밤을 지새는 것)을 했다. 이는 목숨을 이미 하늘에 맡긴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후에도 둘은 2000년 여름 K2(8,611m, 세계 제2위 봉), 2001년 봄 시샤팡마(8,047m, 세계 제12위 봉), 2002년 에베레스트의 정상을 같이 밟은 동료이자 아우였다.
엄 대장은 10개월간의 준비 끝에 휴먼원정대를 구성해 지난 3월14일 박 대원의 시신이 묻혀 있는 초모랑마로 떠났다. 대원은 <중앙일보> 2명, 방송 스태프 5명, 작가 1명을 포함해 모두 18명으로 대규모 원정대였다. 셰르파도 18명이나 되었다.
[SET_IMAGE]3,original,left[/SET_IMAGE]원정대는 지난 4월5일 네팔을 출발해 이틀 만에 초모랑마 베이스 캠프(5,200m)에 도착했다. 그리고 4월13일 베이스 캠프에서 라마제를 지내고 본격적인 등반에 나섰다. 히말라야 등반은 고소 적응과 일기 변화에 큰 영향을 받는다. ‘좋은 일일수록 걸림돌이 많은 것’처럼 순조롭게 진행되던 등반도 노스 콜(7,100m)에서 주춤했다. 캠프 2(7,900m)와 캠프 3(8,300m)으로 진출하려다 연일 계속되는 강풍을 만났다. 시신 수습 일정이 더 이상의 진척을 보지 못하며 자꾸 연기됐다. 그러다 보니 시신 수습 후 초모랑마를 떠나기까지 두 달을 꽉 채우게 됐다.
우여곡절 끝에 원정대는 베이스 캠프에 들어온 지 53일 만인 지난 5월29일 완벽하게 시신을 수습할 수 있었다. 특히 이날은 1953년 영국의 에드먼드 힐러리와 텐징 노르게이 셰르파가 인류 최초로 에베레스트 정상을 밟은 지 52년 되는 뜻 깊은 날이었지만, 시신 수습은 다른 원정대의 초모랑마 등정보다 늦었다.
엄 대장은 원정을 마치면서 “그동안 약 20년간 히말라야를 찾았지만 이번처럼 가장 길었던 원정은 처음”이라며 “무엇보다 박무택 대원의 시신을 옮겨야 한다는 것 때문에 좋은 날씨를 기다리지 않을 수 없었다”고 설명했다. 그는 “등정과 시신 수습은 엄연히 다르다. 등정은 정상에 올라 사진만 찍고 날씨가 조금 나쁘더라도 바로 하산하면 되지만, 시신 수습은 정상 가까이 올라가 시신을 수습한 후 5~6명의 구조대가 발을 맞춰가며 운구해야 하기 때문에 기상이 하루 종일 좋아야 한다는 ‘또 하나의 조건’을 안고 있다”고 어려움을 토로한다.
특히 “한국에서 예상했던 것과 달리 그동안 쌓였던 눈이 두꺼운 얼음으로 변해 시신을 감싸고 있어 끌어올리는 데 힘이 많이 들었다”며 “무게가 100kg이 넘는 데다 다리를 구부린 상태여서 한국에서 특수 제작한 구조용 색에 수습을 못 하고 로프로 묶어 운구하다 보니 많은 어려움이 따랐다”고 당시 현장 분위기를 설명했다. 그리고 나머지 두 명(백준호·장민)의 대원 시신을 수색하며 올라갔지만 끝내 찾지 못한 것이 아쉽다고 그는 말한다.
이러한 어려움 때문에 직선거리로 100여m를 운구하는 데 2시간 이상이 소요됐다. 엄 대장은 할 수 없이 박 대원의 시신을 네팔의 수많은 히말라야 봉우리와 티베트의 광활한 고원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8,600m 지점의 양지바른 곳에 돌무덤(케른)을 쌓고 안장했다.
이렇게 박 대원의 시신 수습을 마치고 베이스 캠프로 돌아온 엄 대장은 “그동안 등반을 하면서 많은 시신이 등산 루트에 그대로 방치돼 있는 것을 무심하게 지켜봤지만, 이번 등반을 통해 그들 유족의 아픔을 조금이나마 느끼게 됐다”며 “내년 봄 최종 목표(‘14+2’ 등정)인 로체 샤르(8,400m) 원정을 성공적으로 마치면 세계 각국의 등산협회와 공동으로 히말라야에서 숨진 산악인들의 시신을 수습하거나 유품이라도 가족의 품에 안겨줄 수 있는 프로젝트를 추진할 생각”이라고 밝혔다.
프랑스의 산악작가인 가스통 레뷔파는 “히말라야는 신비의 왕국이다. 이곳에 들어가는 무기는 의지와 애정뿐”이라고 말했다. 엄 대장은 끊임없는 한계상황 속에서도 이런 의지와 애정으로 무장하고 히말라야로 발길을 돌렸다. 앞서 그가 말한 계획에서 짐작하듯 산악인 엄홍길의 도전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우리에게 끊임없는 도전 정신을 보여주는 그는 이 시대의 아름다운 사람 중 하나임에 틀림없다.
[RIGHT]초모랑마 베이스 캠프=김세준 중앙m&b 기획위원[/R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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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공감누리집(gonggam.korea.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