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T_IMAGE]3,original,center[/SET_IMAGE]
[SET_IMAGE]1,original,left[/SET_IMAGE]"아기의 돌을 무사히 넘긴 심정이라고 할까요?”
<난타(COOKIN)>를 뉴욕 무대에 올린 지 1년을 맞은 PMC 송승환(48) 대표의 소감이다. 대한민국을 대표할 만한 문화코드 가운데 하나로 자리 잡은 퍼포먼스극 <난타>가 뉴욕의 오프 브로드웨이를 강타했다.
<난타>는 지난해 3월7일 한국 창작 공연으로는 처음 오프 브로드웨이에 전용 극장을 마련해 ‘오픈 엔디드 런(Open-ended Run: 기한을 정하지 않되 매출액이 목표액을 밑돌면 협의 아래 막을 내리는 방식)’으로 계약한 뒤 공연을 시작했다. 언제까지 공연을 계속할 수 있을지 불투명한 상황에서 막을 올린 <난타>는 그러나 1년을 넘겼고, 이제는 극장 관계자들이 먼저 장기공연을 논의해 올 만큼 현지에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새로운 도전을 통해 <난타>가 얻어낸 결실 또한 눈부시다. 1년 동안 관객이 10만 명을 넘었고, 총매출도 598만 달러를 기록했다. 극장을 찾은 관객들은 현지인 75%, 관광객 15% 그리고 한국인이 10%로 조사됐다. PMC 측은 향후 관광객들의 관람 비율을 70~80%까지 끌어올린다는 계획이다. 장기공연을 위한 포석이다. 진입도 어렵지만 장기공연은 더 어렵다는 브로드웨이에서 1년을 성공적으로 ‘버텨낸’ 송승환 대표도 만감이 교차하는 듯했다.
“제작자로 출발하면서 꼭 세계 무대에 진출하겠다고 했는데, <난타>를 통해 그 꿈을 이루어 말할 수 없이 기쁩니다. 제가 늘 이야기하듯 <난타>를 제가 죽고 30년 뒤에도 공연되는 작품으로 만들 거예요. 이제 그 토대를 닦았다고 보면 됩니다.”
[B]비언어극으로 언어장벽 극복[/B]
그는 열 살 때 어린이 이야기대회에 나가 1등상을 받은 것이 계기가 돼 아역 성우가 됐고, 이후 고교 1학년 때 출연한 드라마 <여로>에 이르기까지 라디오·TV·영화 등에서 연기자로 한 시절을 풍미했다. 하지만 그는 <여로> 출연을 마지막으로 인기 절정에서 연기생활을 중단했다.
“학생의 본업은 공부인 만큼 대학입시에 충실해야겠다고 결심했죠. 연기생활은 어린 시절 취미생활로 접고, 대학에 가서는 새로운 인생을 살아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재수를 거쳐 입학한 곳이 한국외국어대 아랍어과. 당시 중동 특수로 인기가 높던 분야였지만 그는 학과 공부는 금세 뒷전으로 밀고 연극 활동에 뛰어들었다. 한동안 연극에 빠져 있던 그는 결국 대학까지 포기하고 말았다. ‘극단 76’에 입단한 그는 미친 듯 연극에 몰두했고, 1978년에는 연극 연출과 제작에도 뛰어들었다.
“배우라는 직업이 수동적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배우는 캐스팅돼야만 뭔가를 할 수 있는 만큼 조금 더 능동적이고 창의적인 일에 뛰어들고 싶었습니다.”
수없이 많은 연극에 제작자 또는 배우로 혼신을 다했던 그가 세계시장에 도전장을 내밀겠다고 결심한 것은 1996년. 당시로서는 엄청난 제작비인 7억 원을 쏟아부어 창작 뮤지컬 <고래사냥>을 무대에 올려 전국 순회공연을 할 정도로 큰 성공을 거두었지만 국내 공연무대의 현실적인 벽을 넘지는 못했다. 공연은 인기를 끌었지만 제작비조차 건지지 못한 것. 순회공연 후 창고 비용을 마련하지 못해 1억5,000만 원을 들여 지은 세트를 부수면서 눈물을 흘려야 했다. 하지만 이 일은 그의 새로운 꿈과 야망에 불을 지폈다.
국내시장에서 흥행에 성공해 봤자 투자비도 건지기 어려운 상황이라면, 남은 방법은 하나밖에 없었다. 좁은 국내시장을 벗어나 해외시장에도 수출할 수 있는 공연을 제작하자는 결론이었다.
“친하게 지내던 모 신문사 연극 담당 기자와 술을 마시다 ‘넌버벌 퍼포먼스’(Non-Verbal Performance) 공연 이야기가 나왔어요. 런던에 출장갔는데 넌버벌 퍼포먼스가 유행하더라는 이야기였어요. 저도 마침 세계시장에 나가려면 어떤 연극을 해야 하나 고민하던 중이었는데 언어 장벽을 극복할 수 있는 묘안이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확 떠올랐죠!”
이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 사물놀이 장단에 맞춰 5명의 요리사가 각종 부엌용품을 두드리는 비언어극 <난타>였다.
[B]‘브로드웨이아시아’와 제휴가 해외 성공 열쇠[/B]
[SET_IMAGE]2,original,left[/SET_IMAGE]“<난타>가 국내시장에서 성공한 것은 ‘패밀리쇼’여서 가능했던 것 같아요. 종래 우리 연극은 어려웠거든요. 대학생이 아니면 극장을 찾지 않았고, 극장에 가 봐야 어렵고 지루했어요. <난타>는 학력이나 나이와 상관없이 만족도가 비슷해요. 할머니부터 손자까지 전 세대가 재미있게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난타>가 세계시장에서 성공할 수 있었던 요인을 “해외 진출을 모색하던 초기부터 ‘브로드웨이아시아’라는 세계 굴지의 프로덕션과 파트너십을 체결하고 그들의 노하우에 따라 차곡차곡 마케팅해 온 것”이라고 분석했다.
“국내시장은 어려서부터 쌓은 체험적 노하우가 있었죠. 그러나 해외 진출은 전혀 달라요. 정보도, 노하우도 없이 우리가 직접 미국에 진출하는 것은 무모한 일이죠. 오프 브로드웨이 진출만 해도 우리가 마케팅할 재주가 없었어요. 결국 현지 사정을 잘 아는 로컬 프로덕션과 어떻게 파트너십을 잘 갖추느냐가 해외 진출 성공의 관건입니다.”
1997년 국내에서 <난타>를 초연한 지 7년, 전 세계 공연 제작자의 꿈의 무대라는 브로드웨이에 진출한 지 1년. 그동안 많은 난관을 헤쳐왔지만 그는 한 번도 ‘이게 끝이다’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다.
“한 고비 한 고비를 너무 어렵게 넘어왔기 때문에 아까워 포기하지 못한 것 같아요. 처음부터 쉽지 않은 구상이었고, 또 시작 단계부터 너무 어려웠거든요. 공을 많이 들인 일은 쉽게 포기하지 못하잖아요?”
지금도 그는 아침에 일어나면 가장 먼저 이메일로 오프 브로드웨이 극장의 전날 관객 수와 예매 상황을 확인한다. 뉴욕 현지 무대감독이 보낸 전날 공연 리포트도 빼놓지 않고 읽는다. ‘오픈 엔디드 런’ 공연인 만큼 관객이 떨어질 때는 가슴이 타 들어간다. 다행히 브로드웨이의 비수기라는 1~2월을 무사히 넘겨 요즘은 한 시름 놨다고 한다.
“1~2년이 아니라 10년 뒤에도 살아남을 수 있는 생명력을 가진 콘텐츠를 개발하는 일이 제가 PMC를 이끌면서 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모든 콘텐츠가 <난타>처럼 성공할 수는 없겠지요. 그러나 언젠가는 우리가 만든 창작 뮤지컬이 일본·중국을 거쳐 유럽과 미국에도 갈 수 있지 않을까요? 그것을 위해 지금도 끊임없이 도전하고, 또 새로운 것을 기획하고 있습니다.” [RIGHT]오효림 기자[/RIGHT]
공감누리집의 콘텐츠 자료는 「공공누리 제4유형 : 출처표시 + 상업적 이용금지 + 변경금지」의 조건에 따라 자유롭게 이용이 가능합니다.
다만, 사진의 경우 제3자에게 저작권이 있으므로 사용할 수 없습니다.
콘텐츠 이용 시에는 출처를 반드시 표기해야 하며, 위반 시 저작권법 제37조 및 제138조에 따라 처벌될 수 있습니다.
[출처] 공감누리집(gonggam.korea.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