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윤섭 기자
문성현(67) 경제사회노동위원회 위원장은 언제부턴가 ‘민주’와 ‘진보’의 가치가 하나로 만나는 지점을 탐색하는 길잡이로 나섰다. 노동운동 30년, 진보정치 10년의 경험에서 그가 선택한 일이다. 서로 생각과 이해가 다르더라도 함께 어우러지는 게 민주주의의 중요한 덕목이며, 국민에게 ‘밥 먹여주는 정치’의 구현이 실력 있는 진보라는 게 문 위원장의 달라진 생각이다. 대통령 직속 사회적 대화기구인 경사노위가 그런 생각을 펼치기에 적합한 무대가 될 수 있을까?
서막은 밝게 올렸다. 경사노위는 탄력적 근로시간제 개편과 관련한 협상을 2월 19일 마침내 타결했다. 경사노위가 2018년 11월 22일 공식 출범한 뒤 이뤄낸 첫 합의로, 두 달여 동안 아홉 차례의 회의 끝에 맺은 결실이다. 현행 최장 3개월인 탄력근로제의 단위기간을 6개월로 확대하되, 근로일 사이 휴식시간 11시간 보장과 3개월을 초과하는 탄력근로제 도입 때 임금 보전 방안을 마련한다는 게 합의 내용이다.
“포용적 성장, 아직 긴 여정 남아 있어”
문성현 위원장은 “그동안 사회적 대화를 통한 합의는 추상적이고 선언적인 수준에 머물렀는데, 이번에는 첨예하게 대립하는 구체적인 안건인데도 노사가 서로 조금씩 양보해 세세한 부분까지 절충점을 찾았다. 무엇보다 사회적 대화를 통한 문제 해결의 희망을 국민에게 보여줬다는 점에서 이번 합의는 의미가 크다”고 평가했다. 문 위원장은 “사회적 대화를 통해 노동문제를 포함한 사회, 경제적 갈등을 풀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할 수 있다”면서도 “국민이 원하는 양질의 일자리 창출과 노동이 존중받는 사회, 국민이 골고루 잘 사는 포용적 성장이 실현되려면 아직 긴 여정이 남아 있다”고 말했다.
경사노위는 올해 안에 결말을 내거나 다루기로 한 굵직굵직한 의제들을 안고 있다. 국제노동기구(ILO) 핵심협약 비준, 산업안전 강화, 사회안전망 확충, 연금개혁과 노후소득 보장, 디지털 전환에 대한 공동 대응, 금융·해운 산업 발전과 고용 안정 등을 놓고 의제별 또는 업종별 위원회가 구성돼 팽팽한 논쟁을 펼칠 예정이다. 해법을 찾아야 한다는 데는 모두 동의하지만, 구체적으로 들어가면 만만한 쟁점이 하나도 없다. 한꺼번에 한 가지 방법으로 해결할 수도 없는 과제들이다. 문성현 위원장에게 사회적 대화로 풀어야 할 주요 의제들과 올해 경사노위 활동 계획 등을 물어봤다. 인터뷰는 2월 11일 서울 종로구 새문안로 에스타워 8층에 있는 경사노위 위원장실에서 먼저 이뤄졌고, 그 뒤 전화 통화로 보완했다.
“국내외적으로 매우 드문 사례”
-탄력근로제 단위기간의 확대를 둘러싸고 그동안 노동계와 경영계 간에 팽팽한 줄다리기를 이어왔다. 이런 민감한 사안을 경사노위의 첫 번째 안건으로 올린 배경은?
=2018년 7월부터 법정 노동시간 단축(주간 최장 68시간에서 52시간으로)이 단계적 시행에 들어가면서 탄력근로제가 뜨거운 쟁점으로 부각됐다. 노동계로서는 장시간 노동의 해소라는 취지에 맞지 않는다며 거부할 일이지만, 기업 현장에서는 노동시간 단축의 보완 대책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나올 수밖에 없었다. 노사 양쪽에 이해관계가 뚜렷하게 엇갈리는 정책은 한쪽의 목소리만 전적으로 수용하거나 완전히 배제한 채 밀어붙이면 후유증이 뒤따른다. 특히 노사 간 쟁점은 시간이 다소 걸리더라도 신뢰에 기반을 둔 협의를 통해 풀어나가는 게 바람직하다. 그런데 당·정·청이 의제와 일정을 이미 합의해놓은 터라 경사노위로서는 최우선 안건으로 다룰 수밖에 없었다.
-합의에 이르기까지 상당한 진통을 겪은 것으로 알고 있다. 논의 과정에서 노사 양쪽의 관계는 어땠나?
=사회적 대화라는 틀은, 서로 배제하지 않고 같이 모여서 상대방 입장을 들어보고 차이를 좁히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게 기본 전제이고 원칙이다. 탄력근로제에 대한 협상에서 노사 대표는 바로 이런 전제와 원칙을 존중한 가운데 상대방과 주고받기를 했다. 그래서 추상적 선언이 아니라 수치까지 포함된 구체적 합의를 사회적 대화로 도출했는데, 국내외적으로 매우 드문 사례다. 탄력근로제와 관련한 사회적 대화에 참여한 주체들의 적극적인 의지와 책임 의식을 높이 평가한다. 탄력근로제에 대한 이번 합의가 앞으로 진행할 사회적 대화 의제의 타결에 시금석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
▶곽윤섭 기자
“ILO 핵심협약 3월 말까지 매듭”
-국제노동기구(ILO) 핵심협약의 비준 방안 마련 등 앞으로 경사노위가 다룰 의제들의 합의 전망은?
=ILO 핵심협약에 대해서는 ‘노사관계 제도·관행 개선위원회’에서 꾸준히 논의를 해왔고, 늦어도 3월 말까지는 매듭지을 예정이다. 노사 대표가 합의하지 않더라도 공익위원 권고안의 형태로 발표할 계획이다. 해고자의 노동조합원 자격을 인정하는 것과 교사와 공무원의 노동조합 가입 범위 확대가 핵심 쟁점이다. ILO 협약의 비준에 따라 노동법 개정이 이뤄지면 노동기본권의 실질적 보장 대상이 확대된다. 사용자 쪽에서는 이에 대한 대가로 단체협상 유효기간의 연장, 사업장 점거행위 억제 등을 요구하고 있는데 해당 의제를 다루는 위원회에서 절충점을 모색 중인 것으로 알고 있다. 고 김용균 씨 산재사망 사건을 계기로 산업안전보건제도의 실효성을 높이는 방안에 대한 논의도 속도를 내고 있다. 일터의 안전 강화와 과로사 방지를 위한 법안을 국회에 제출하려고 준비 중이다.
-사회적 합의가 중요하지만 ILO 핵심협약 비준이나 산업안전 강화와 같은 정책은 정부가 의지를 갖고 관철해야 하는 것이지, 사회적 대화기구에 떠넘길 사안이 아니라는 비판도 있다.
=노동 관련 정책은 정부가 일방적으로 밀어붙이는 것보다 사회적 공감대를 바탕으로 추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ILO도 노·사·정 3자 합의를 통한 협약 비준을 권고한다. 그렇게 해야 노동권을 더 효율적이고 안정적으로 보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노사 대표 간 성숙된 논의와 타협 없이 시행되는 정책은 어느 한쪽을 ‘편들기’한다는 인상을 줘 새로운 사회적 갈등의 불씨가 될 수 있다. 노동의 이익과 기업의 이익은 장기적으로는 일치하겠지만 단기적으로는 충돌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해관계가 명백하게 엇갈리는 정책 과제는 이해당사자 간 합의 모델을 되도록 많이 만드는 게 중요하다. 정부는 당사자 간 대화를 촉진해 자율적 합의를 유도하면 된다.
“민노총 내부 소통과 합의 안타까와”
-사회적 대화기구에서 어렵게 합의를 하더라도 정부에서 받아들이지 않거나 국회 입법 절차가 지연되면 어떻게 하나?
=그럴 가능성이 거의 없다. 문재인 대통령은 경사노위 출범식 등 여러 자리에서 노사가 합의한 사안은 단순히 권고안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반드시 추진해야 할 정책 과제로 채택하겠다고 공언했다. 국회도 노사 대표가 참여한 가운데 타결된 합의안은 어떤 성격의 정당이든 소홀히 취급하지 못한다. 경험에 비춰볼 때 오히려 입법 절차가 더 빨라지는 사례가 더 많다.
-이전 정부의 사회적 대화기구와 비교하면 문재인정부의 경사노위는 위상과 기능이 많이 다른가?
=본질적인 기능은 크게 다를 게 없다. 조직 구성과 운영 방식은 많이 달라졌다. 기구 이름이 ‘경제사회발전노사정위원회’에서 ‘경제사회노동위원회’로 바뀌었고, 기존 노사 대표를 중심으로 청년·여성·비정규직과 중견·중소기업·소상공인 대표 등으로 참여 주체를 넓혔다. 의제, 산업, 지역별 대화체제도 강화했다. 노동 현안을 중심으로 하되 이와 직간접적으로 연관된 국가 차원의 경제, 복지, 산업 정책에 이르기까지 더 넓은 의제를 더 깊게 대화하는 사회적 대화기구로 거듭나겠다는 취지다.
-그런데 정부의 기대와 달리 민주노총이 1월 28일 대의원 대회에서 사회적 대화 참여를 보류했다. 탄력근로제 단위기간 합의에 대한 민주노총의 반발이 거세 당분간 참여할 가능성도 희박해 보인다. 노동계의 양대 축 중 한 축이 빠진 가운데 원활한 사회적 대화가 진행될 수 있나?
=현재 주요 의제별 위원회 구성에는 한국노총 대표나 추천 위원으로 균형을 맞춰놓은 만큼 큰 문제는 없다. 다만 사회적 대화의 의미에 대한 민주노총 내부의 소통과 합의가 아직 무르익지 않은 것 같아 안타깝다. 노동운동의 환경이 많이 달라졌다. 사회적 정당성을 갖춘 요구와 주장으로 사회적 지지 기반을 넓혀야 한다. 사회적 대화를 거부한 채 현안이 생길 때마다 청와대나 국회 앞에서 농성한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사회적 대화가 성공을 거두려면 참여 주체들이 상대방 존재를 존중하고 신뢰를 쌓으려는 노력을 끊임없이 해야 한다. 옳고 그름의 이분법으로 접근하고 자기 요구만 고집하면 사회적 대화는 안 된다. 민주노총의 일차적 대화 상대는 사용자 쪽, 즉 경영계다. 새로운 사회적 대화기구는 정부가 의제를 주도적으로 제시하는 방식이 아니라 노와 사가 중심이 된 논의 구조를 지향한다. 노와 사가 좀 더 성숙한 책임 의식을 갖고 의제 설정과 협의를 주도할 수 있는 조건은 조성돼 있다.
-경사노위가 아니더라도 사회적 대화에 참여해 현안을 풀어나갈 방법이 많지 않나?
=그렇다. 얼마 전에 타결된 ‘광주형 일자리’에 대한 합의를 대표적인 사례로 꼽을 수 있다. 지역이든 특정 산업이든 현안 과제를 놓고 다양한 계층의 지혜와 역량을 모아 해결 방안을 찾아가면 그게 바로 의미 있는 사회적 대화다. 중간에 몇 차례 시행착오도 겪었다고 들었다. 그러나 목표와 방향이 뚜렷하면 단계적이고 부분적인 문제는 참여 주체들 간 대화와 타협으로 쉽게 해결할 수 있다.
광주형 일자리의 핵심 목표는 지역 청년들에게 괜찮은 일자리를 만들어주는 것이다. 갈 만한 일자리가 없어서 지역 청년들이 떠나는 현상을 극복하자는 지역 노·사·민·정의 의지가 실현된 게 바로 광주형 일자리 프로젝트다.
특정 산업이나 개별 기업 단위에서도 위기의식을 공유하면서 서로 신뢰하고 존중하는 자세로 접근하면 노사 간 사회적 대화가 가능하다. 민주노총 산하 전국사무금융서비스노동조합은 최근 대의원 대회에서 사측이 사내 비정규직의 정규직화에 나설 경우 올해 임금을 동결해도 좋다는 임금 협상안을 합의해 발표했다. 같은 업종 내 비정규직과의 연대를 위한 사회적 합의라고 볼 수 있다. 이처럼 노동 현장에서는 사회적 대화의 필요성에 대한 인식이 점차 확산되고 있다.
“국민 체감 성과 많이 낼 수 있게”
-끝으로 위원장으로 재직하는 기간에 꼭 이뤄졌으면 하는 정책 과제가 있다면 소개해달라.
=특별히 한 가지 과제를 꼽기보다는 사회적 대화가 잘되고 국민이 체감할 수 있는 성과도 낼 수 있는 사례가 많이 나왔으면 한다. 어떤 의제든 서로 양보하거나 필요하면 비용도 분담하는 자세로 대화하고 타협하는 관행과 문화가 퍼졌으면 좋겠다. 합의가 도출되지 않더라도 실패로 단정하거나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장애 요소가 무엇이고 극복 방안을 어떻게 찾아야 하는지에 대한 성찰적 토론도 의미 있는 사회적 대화다. 말하자면 ‘기–승–전, 사회적 대화’인 셈이다.
박순빈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