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드의 우영우’ 자폐 스펙트럼 장애 골퍼 이승민 프로
매년 4월 2일 지구는 유난히 푸른빛으로 빛난다. 유엔(UN)이 지정한 ‘세계 자폐인의 날’을 맞아 170개국 곳곳에서 자폐인에 대한 관심을 촉구하며 파란빛을 밝히는 ‘블루 라이트 업(Light Up Blue)’ 캠페인이 벌어진다. 이날 프로축구 K리그1 수원삼성의 홈경기가 벌어진 경기 수원월드컵경기장도 파란빛을 밝히고 특별한 시축 행사를 벌였다. 시축자는 ‘필드의 우영우’로 불리는 자폐 스펙트럼 장애 골퍼 이승민(26) 프로. 이승민은 2022년 7월 미국에서 개최된 ‘제1회 US 어댑티브 오픈(US Adaptive Open)’ 초대 챔피언이다. 연장전까지 가는 접전 끝에 우승컵에 자신의 이름을 새긴 이승민은 자폐인에게 희망의 이름이 되고 있다.
“다른 사람에 비해 행동이 별나고 특이할 수 있는데… 장애를 앓고 있지만 똑같은 사람이니까… 이상하게 쳐다보지 말고… 이해하는 눈으로 바라봐주면 좋겠어요.”
4월 5일 경기 용인시 수원컨트리클럽에서 만난 이승민은 느리지만 또박또박 자신의 장애를 설명했다. 2022년 세계적으로 화제를 불러일으킨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에서 자폐인 우영우(박은빈 분)가 첫 재판을 맡은 법정에서 자신의 장애를 설명하던 장면이 떠올랐다. 드라마 ‘우영우’가 인기몰이를 하던 때 이승민이 US 어댑티브 오픈에서 우승하면서 ‘필드의 우영우’로 불리게 됐다.
“우영우처럼 유명해져서 기분이 좋다”는 그에게 시축할 때 떨리지 않았느냐고 물으니 “많은 사람들이 나를 바라볼 때 더 신나고 흥분된다”고 말했다.
인터뷰에는 어머니 박지애 씨가 함께했다. 이승민은 답변이 막히고 당황할 때면 엄마를 쳐다봤다. 엄마는 “천천히 생각해봐! 대답할 수 있어”, “기자님이 기다려 주실 거야”라면서 이승민을 다독였다. 인터뷰에 앞서 보낸 사전 질문지에서 “엄마는 어떤 존재냐?”는 물음에 이승민은 “나를 언제나 기다려주는 사람”이라고 답했다.
자폐인의 증상이나 특징은 다양하다. 이승민은 숫자나 특정 부분에선 뛰어나지만 지능은 6~7세 아이에 머물러 있다. 세 자릿수 계산은 척척 해내고 기억력은 뛰어나지만 책이나 드라마를 봐도 맥락을 이해하거나 스토리를 파악하진 못한다.
사람들과 눈 맞추고 말하는 것은 물론 부모와 소통도 어려웠다. 승민의 사회성을 키워주기 위해 부모가 선택한 것은 스포츠였다. “초등학교에 입학해서 협업이 필요한 아이스하키를 가르쳤다. 거친 운동이다 보니 다른 아이들에게 피해가 갈 것 같아 6학년 때 그만뒀다”는 것이 박 씨의 설명이다. 골프는 13세 때 시작했다. 한 순간도 집중이 어려운 승민이 TV에서 골프만 나오면 눈을 떼지 않았다. “공이 슝 날아가는 것이 신기했다”는 것이 이승민의 표현이다. 17세에 세미프로 자격증을 따고 20세에 자폐인으로는 최초로 한국프로골프(KPGA) 정회원(투어프로) 선발전을 통과했다. 투어프로 테스트는 ‘골프 고시’로 통할 만큼 비장애인에게도 힘든 일이다. 그렇다고 이승민이 ‘골프 천재’는 아니다. 오늘의 이승민을 만든 것은 노력이다. 이승민은 한번 골프채를 잡으면 놓치 않을 만큼 연습벌레다. 이승민은 “골프는 나에게 희망, 사람들에게 잘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올해 목표는 뭔가?
디펜딩 챔피언(지난 대회 우승자)으로 7월 10일 열리는 제2회 US 어댑티브 오픈에 나가서 2연패하는 것이 올해의 가장 큰 목표다. 6월 출국 전까지 큰 대회 경험을 많이 쌓으려고 한다. 지난해 KPGA 코리안 투어에서 컷통과(예선통과)를 한 번 했는데 올해는 더 많이 컷통과를 하고 ‘톱10’에도 들고 싶다.
하루 연습량이 궁금하다.
경기나 연습 라운딩이 없는 날은 새벽 6시부터 움직인다. 오전 일찍 파3를 돌고 숏 게임이나 퍼터 연습을 한다. 점심 후에 다시 샷 연습을 하고 저녁엔 체력훈련이나 회복운동을 한다.
자폐인에게 골프가 좋은 운동이라고 생각하나?
사람들과 어울려서 사회성을 키우는 데는 도움이 되지만 기술을 배우는 것은 많이 힘들다.
자신의 장점과 단점을 꼽으라면?
장점은 느리지만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노력한다는 것이다. 단점은 남들보다 집중력을 오래 유지하는 게 제일 힘들다.
공을 치는 순간 무슨 생각을 하나. 자신만의 습관이 있나?
최대한 생각을 안 하고 연습한 대로 가볍게 치려고 노력한다. 티샷은 넓은 페어웨이를, 퍼터는 홀컵 안에 공을 넣는다는 생각만 한다. 공 치는 시간을 한 번에 35초 안에 끝내기 위해 노력 중이다.
경기 중 이승민을 괴롭히는 것 중 하나는 속도다. 공을 치기까지 오래 걸리다 보니 경기 지연 때문에 운영팀이 따라붙는다. 그럴 경우 심리적 압박감이 심해지고 경기에 집중하기 힘들어진다. 박 씨는 “어떤 변수가 생길지 모른다. 어려운 것은 척척 하면서 이렇게 쉬운 것을 왜 못할까 싶은 것이 많다”고 말했다. 그린에서 다른 선수의 볼 앞을 지나면 안되는 기본 규칙도 매번 알려줘야 한다. 예측 불허인 승민을 따라다니면서 박 씨는 “죄송하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복병은 이승민을 우리 은하계 밖 ‘안드로메다’로 불러내는 알 수 없는 친구들이다. 박 씨는 “승민이를 불러내는 한국 친구를 동수, 미국 친구를 캐빈이라고 부른다. 그 친구들이 시시때때로 승민이를 찾아온다”고 말했다. 자신만의 세계로 떠나 ‘멍’ 때리는 승민을 현실로 불러내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또 하나 이승민이 포기하지 못하는 것은 개미 행렬이다. 한 타를 다투는 상황에서도 줄지어 가는 개미들이 눈에 띄면 경기는 뒷전이 되고 만다. 오늘의 이승민이 되기까지 비장애인보다 몇 배, 몇 십 배의 노력이 필요했다는 이야기다.
골프를 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순간을 꼽으라면 언제인가?
2019년에 차이나투어를 시작하면서 드라이버가 안 맞기 시작했다. 티박스에 올라가는 것이 두렵고 힘들었다. 3년 넘게 고생해 지금은 똑바로 멀리 칠 수 있는 드라이버샷을 만들었다.(이승민의 드라이버샷 페어웨이 안착률은 일반 프로선수들에 비해서도 뛰어나다)
골프를 포기하고 싶을 때는 없었나?
공이 안 맞으면 포기하고 싶을 때가 많았다. 그래도 어제보다 오늘, 오늘보다 내일 더 나아질 것이라는 생각으로 이겨냈다.
경기 도중 위기가 오면 어떻게 하나?
예전에는 트러블샷(공을 치기 어려운 위치)이나 어려운 상황이 오면 막 불안했는데 요즘엔 모든 시합을 캐디 형과 의논하고 침착하게 위기를 벗어날 수 있도록 노력한다.
이승민이 말하는 캐디 형은 윤슬기 캐디 겸 코치를 말한다. 2019년 슬럼프가 왔을 때 윤 코치가 이승민의 캐디를 자처하고 나섰다. 해병대 출신인 윤 코치의 인생 구호는 ‘안되면 될 때까지’이다. 될 때까지 몰아붙이는 윤 코치가 좋을 리 없다.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먼저 다가가 팔장을 끼는 승민이 윤 코치와는 절대 팔장을 안 낀다고 한다. 이승민은 윤 코치에 대해 “나를 가장 힘들게 하는 사람”이라면서도 “내가 더 잘할 수 있게 이끌어 주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이승민의 집중력을 잡아두기 위해서는 ‘스위치’가 필요하다. “안되면”, “될 때까지!”, “정신을” “차리자!”. 윤 코치가 선창하면 승민이 따라 외친다. 2022년 US 어댑티브 오픈 마지막 라운드의 마지막 홀, 경쟁자는 공을 그린에 올린 상태였고 이승민은 공이 나무 밑 러프에 떨어진 상황이었다. 당황한 이승민은 어쩔 줄 모르고 “어떡하지”만 내뱉고 있었다. 다급한 윤 코치가 옆에서 큰 소리로 “정신 차려!”를 외쳤다. 그 소리에 놀란 이승민이 다시 집중한 덕분에 연장전으로 갈 수 있었고 결국 우승컵의 주인공이 됐다. 우승은 이승민에게 큰 전환점이 됐다.
우승 이후 많은 것이 달라졌을 것 같다. 어떤 것들이 있나?
요즘 사람들이 많이 알아봐 주고 인터뷰와 행사 요청이 많이 들어온다. 응원을 보내주는 사람도 많다. 그래서 더 잘해야 되겠다는 생각이 든다. 나에 대한 믿음도 더 생겼다. 예전에는 공을 칠 때 불안해서 주춤거렸는데 이젠 내가 원하는 곳으로 보낼 수 있다는 확신이 생겼다.
어떤 골프선수가 되고 싶나?
어떤 어려운 일이 있어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노력하는 위대한 선수가 되고 싶다. 나를 보면서 희망을 갖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에 책임감을 느낀다. 미국 마스터스 대회에 참가해 컷통과를 하고 마지막 파이널 라운드 18번 홀 그린을 밟는 날까지 열심히 노력할 것이다.
자폐인을 위해 버디와 이글을 할 때마다 1만~2만 원씩 모으고 있다고 들었다. 얼마나 모았나?
지난해 11월 이후부터 모으기 시작했다. 23년도 시즌이 시작된 지 얼마 안돼 시합 중에 버디 31개를 기록했다. 그때마다 돼지저금통에 1만 원씩 넣었다. 연습 중에는 버디 422개를 기록해서 숫자만 적어놓고 있다.
이승민의 최고 기록은 대회 때는 2언더, 연습 라운드 때는 9언더이다. 목표는 장애인 경기가 아니라 일반 대회 우승에 도전하는 것이다. 도전이 곧 연습과 인내라는 것을 알고 있기에 이승민의 내일은 분명 오늘보다 나을 것이다. 골프는 이승민의 삶을 바꿨다. 처음 선천성 자폐성 발달장애 2급을 진단받았지만 골프를 시작하고 사회인지지수가 높아진 덕분에 3급이 됐다. 사람과 눈도 못 마주쳤다는 이승민이 지금은 먼저 악수를 청한다. 인터뷰 중에도 프로골퍼가 지나가자 “형님, 잘 지내셨어요?” 하면서 악수를 건넸다. 동물공포증에 시달리던 이승민이 지금은 “연습 끝내고 집에 가 고양이 향기와 놀 때 가장 행복하다”고 말한다. 인터뷰 실력도 늘었다. “얼마 전까지는 대면 인터뷰를 하면 대답도 못했는데 이젠 한마디씩 하더라. 사전 질문지를 받으면 답도 승민이 전부 쓰고 맞춤법 정도만 봐준다”는 것이 박 씨의 설명이다.
엄마의 도움 없인 아무것도 못하던 이승민이 요즘엔 엄마와 분리되는 연습을 하고 있다. 연습장에 갈 때도 직접 운전해서 간다. 엄마에게 해주고 싶은 것이 있느냐는 질문에 이승민은 “스스로 할 일을 잘해서 엄마에게 휴가를 주고 싶다”고 말했다.
황은순 기자
박스기사
US 어댑티브 오픈이란?
미국골프협회(USGA)가 2022년 창설한 장애인 골프대회다. US 오픈, US 여자 오픈, US 아마추어, US 여자 아마추어 등에 이은 미국의 15번째 내셔널 타이틀 챔피언십이다. 지체, 시각, 발달 등 장애를 가진 선수들이 8개 부문에 각각 출전해 장애 정도에 따라 전장이 다른 코스(4개 티잉 구역 사용)에서 3라운드 54홀 스트로크 플레이(최저타 경기)로 순위를 가렸다.
2022년 7월 18~20일 3일간 열린 제1회 대회에서 이승민은 최종 합계 3언더파 213타를 친 뒤 2홀 합산 연장전에서 승리해 초대 챔피언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