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꾼 3代 홍성덕·김금미·박지현 최근 종영한 드라마 ‘정년이’로 여성국극에 대한 관심이 쏠리고 있다. 여성국극은 창극의 한 갈래로 판소리를 근간으로 하는 무대예술의 정수가 담긴 대중문화예술이다. 1948년 국악원에서 여성들만 떨어져 나와 여성국악동호회를 조직한 것이 여성국극의 뿌리다. 1950년대 최고의 흥행을 기록했지만 영화산업의 발달과 TV의 등장으로 쇠퇴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런 여성국극이 다시 살아나고 있다. 그 가운데에는 홍성덕 명창이 있다. 홍 명창은 1960년대 초 국극단에 입단해 지금까지 전통의 맥을 이어가고 있다. 여성국극이 쇠퇴한 후에도 부흥을 꿈꾸며 예술인들을 모아 1986년 서라벌국악예술단을 창단했다. 1993년에는 한국여성국극협회를 발족해 후학 양성과 여성국극의 보전을 위해 힘쓰고 있다.
홍 명창의 어머니는 생전 ‘육자배기’로 유명했던 김옥진 명창이다. 김 명창에게서 시작된 예술인의 피는 모계 쪽으로 뿌리 내렸다. 홍 명창의 딸은 국립창극단 창악부 악장인 김금미(60) 씨로 홍 명창을 이어 여성국극에 발을 담궜다. 외손녀 박지현(22) 씨도 서울대 국악과에 진학해 소리꾼을 길을 걷고 있다. 전주대사습놀이 학생부 문화체육관광부장관상을 받으며 실력을 인정받은 인재다.
최근 홍 명창을 주축으로 3대가 여성국극을 위해 뭉쳤다. 12월 3일과 7일 국가유산진흥원이 마련한 여성국극 특별공연 ‘한국 최초 여성 오페라, 전설(傳說)이 된 그녀들’을 통해서다. 홍 명창은 1부 여성국극 원로 배우들과 함께하는 토크쇼를 통해 여성국극의 역사를 짚어줬다. 딸 김 악장과 외손녀 박 씨는 2부 여성국극 ‘선화공주’ 무대에 올라 각각 서동과 선화공주 역을 맡아 열연을 펼쳤다. ‘선화공주’는 여성국극 전성기에 인기를 모았던 레퍼토리다. 홍 명창과 김 악장 모두 성인이 돼 선화공주 역을 맡았는데 어느덧 세월이 흘러 20대의 외손녀가 선화공주로 분해 함께 무대에 올랐다. 이를 두고 홍 명창은 “여성국극의 세대교체로 봐도 좋다”고 말했다.
공연은 애초 12월 3일 하루만 예정했다가 순식간에 표가 매진되는 바람에 추가 공연을 편성했다. 이 역시 10분 만에 표가 동날 만큼 화제였다. ‘선화공주’의 연출을 맡은 박정곤 씨는 “여성국극이 방송·영화 같은 대중매체가 발전하면서 위기를 맞았는데 이번엔 방송(드라마 ‘정년이’) 덕에 부활의 기회를 맞았다”면서 “나이든 분들에겐 향수를, 젊은 관객에겐 새로운 문화경험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드라마 ‘정년이’의 인기로 여성국극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홍성덕(이하 홍) 드라마 덕분에 여성국극에 관심이 쏠린 점은 기쁘다. 다만 그동안 여성국극을 꾸준히 만들며 지켜왔기 때문에 드라마 ‘정년이’도 나올 수 있었다고 본다.
맞는 말이다. 여성국극의 명맥을 지켜온 홍 명창에게 지난 시간이 주마등처럼 펼쳐질 것 같다. 홍 명창은 어머니 김옥진 명창과 아버지 홍두환 선일창극단장 슬하에서 소리꾼의 길을 걸었다. 홍 부모님으로부터 예술성을 물려받아 남들보다 빠르게 성장할 수 있었다. 어렸을 때 여성국극을 처음 본 순간 매력에 빠졌다. 여성국극의 간판스타 임춘앵이 1960년대 중반 단원을 모집할 때 국극단에 입단했다. 1967년 ‘선화공주’의 주인공을 맡기도 했다. 20대 초반의 일이다. 손녀 지현이가 이번 공연에서 선화공주를 맡아 연기하는 걸 보면서 그때가 떠올라 뭉클했다.
홍 명창은 1980년대 여성국극의 부흥을 일으키며 지금까지 여성국극 보전에 앞장서오고 있다. 홍 여성국극의 부활을 위해 생존해 있는 여성국극인들을 찾아다녔다. 1986년 20여 명의 단원과 함께 서라벌국악예술단을 창단했고 이듬해 국립극장 대극장에서 ‘성자 이차돈’을 공연했다. 1988 서울올림픽 때 축하무대를 갖는 등 큰 주목을 받기도 했다. 이후 거의 매년 작품을 올렸다. 1993년에는 한국여성국극협회를 발족해 국내외에서 활발하게 활동했다. 1996년 호주와 미국에서 초청 공연한 ‘황진이’, 2000년 노르웨이에서 열린 노벨평화상 시상식 축하공연, 2001년 북한 공연 등 잊지 못할 순간이 많다. 여성국극은 특히 해외 관객들이 좋아한다. ‘한국에 이렇게 아름다운 예술이 있는지 몰랐다’며 ‘어디서 여성국극 공연을 볼 수 있냐’고 묻는데 말문이 막히기도 했다. 국내에선 돈이 너무 많이 들어 공연을 잘 못하니까.
여성국극의 명맥을 이어오는 길에 어려운 일이 많았겠다. 홍 쉽지 않았다. 지역 공연을 다닐 때 흥행에 어려움을 겪어 목걸이와 반지를 팔아서 겨우 서울로 돌아온 적도 있다. 단원들을 격려하고 기업 후원금을 모으고 홍보하며 전국 순회공연을 이어갔다.
여성국극에 헌신한 홍 명창에게 딸 김 악장은 최고의 조력자인 것 같다. 홍 딸 금미에게 처음부터 여성국극을 권하지는 않았다. 소리를 내고 연기하고 춤추며 스스로 재능을 끌어올리기를 기다렸다. 스스로 움직이지 않으면 어려운 길이기 때문이다. 금미가 여성국극에 입문하고 부산에서 ‘윤동주’ 무대에 섰을 때가 기억난다. 남자 역을 맡았는데 객석에서 ‘오빠’ 소리가 나오고 무대로 뛰어들고 난리가 났었다(웃음). 타고난 예술성이 있다고 본다. 지금은 국립창극단에 들어가 열심히 자기를 연마하는 모습을 보면서 부모의 마음으로 흐뭇하기도 하다. 김금미(이하 김) 1991년부터 어머니가 이끌던 여성국극 무대에서 주인공으로 섰다. 대부분 여성 역할을 했지만 ‘윤동주’에서는 윤동주의 사촌 송몽규 역할을 하기도 했다. 여성국극은 판소리가 기본이다. 소리에 대한 갈증이 있었고 1999년 35세에 국립창극단에 입단했다. 몰래 입단 시험을 치르고 합격한 뒤 어머니에게 이야기했다. 어머니는 ‘잘했다’고 했지만 속상해 하던 게 기억난다. 창극단 입단 후 2007년 전주대사습놀이 명창 부분에서 장원을 차지하며 소리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딸 김 악장에 이어 손녀 박 씨까지 3대가 소리꾼의 길을 함께 걷고 있다. 김 딸 지현이는 어렸을 때부터 남달랐다. 말도 제대로 못하는 한 살 때 저 혼자 흥얼거리는데 목소리에서 가락이 느껴졌다. 여섯 살에 여성국극 ‘견우직녀’의 아역으로 데뷔한 지현이는 열세살 때 오디션을 통해 국립창극단 ‘아비, 방연’에 캐스팅되며 재능을 인정받았다. 박지현(이하 박) 할머니와 어머니의 무대를 보고 자라며 자연스럽게 이 길로 들어섰다. 청소년기 연예인을 꿈꾸며 방황하던 때도 있었지만 대학입시를 준비하며 판소리로 마음을 잡았다. 이번 ‘선화공주’ 공연에서 선화공주로 무대에 오르는데 할머니와 어머니가 맡았던 역이라서 뿌듯하면서도 그만큼 부담도 컸다.
여성국극의 매력이 무엇이기에 3대가 매료됐을까? 김 한국의 문화가 해외로 뻗어나가고 있는 이때 대중문화의 원조를 찾아가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뿌리를 찾아가는 것이다. 여성국극은 판소리와 무용, 연기, 화려한 무대 등 우리 전통 대중문화의 정수를 보여주는 장르다. 요즘 젊은 세대는 여성국극을 전혀 모르다가 웹툰이나 드라마를 통해 처음 접하고 놀라워하고 있다. 지금이 바로 한국의 정서를 꿰뚫는 대중문화의 원조를 보여줘야 할 때다. 퓨전으로 변형되거나 희석되지 않은 원석 그대로의 모습이 여전히 여성국극에 남아 있다. 이번 특별공연이 원조의 맛을 제대로 보여준 계기가 됐다고 본다.
여성국극 특별공연 ‘한국 최초 여성 오페라, 전설이 된 그녀들’은 표가 동날 만큼 화제였다. 여성국극의 부흥을 꿈꾸며 달려온 지난 시간에 대한 보상이 아닐까? 김 여성국극이 전수되기 위해서는 먼저 장르로 인정받아야 한다. 일본이나 중국은 전통극을 국가가 지원해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여성국극도 이처럼 국가와 기업의 지원과 협력이 필요하다. 지금이 기회라고 본다. 홍 여성국극은 우리 전통문화의 하나로 보존·전승돼야 하는데 가치를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는 현실이 안타깝다. ‘해방 이후 창작돼 전통 유산으로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등의 이유로 2018년 국가무형유산 등재 심사에서 탈락했다. 여성국극을 알리는 데 일념하며 지금까지 지냈는데 자꾸 세월이 가니까 마음이 급해진다. 하루빨리 여성국극이 국가무형유산으로 지정돼 보존되고 필요한 지원을 받았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