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 나선 발달장애인 화가 정은혜
‘인연 두 여자’라는 타이틀의 전시가 열리고 있는 서울 종로구 인사동 갤러리H. 간간이 들리는 웃음소리를 따라가보니 따뜻한 조명이 비추는 테이블을 둘러싸고 옹기종기 사람들이 모여 있다.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에 출연해 인기를 끈 발달장애인 화가 정은혜 작가가 본인의 작품으로 제작한 엽서에 정성스럽게 무언가를 쓰고 있다. 한 글자 한 글자 써내려가는 손길에 정성이 담겨 있다.
일종의 사인인데 가만히 지켜보니 그만의 루틴이 있다. 차례를 맞은 관람객이 작가 앞에 서면 두 눈을 마주치고 인사를 나눈다. 그다음 관람객의 이름, 본인을 상징하는 단어인 ‘우블(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를 줄여서 부르는 말)’, ‘니얼굴(얼굴 캐리커처를 그리는 작업의 이름)’과 함께 ‘행복’, ‘건강’, ‘사랑’ 등의 단어를 기분에 따라 적는다. 본인의 이름까지 쓴 다음에는 옆에 둔 휴대폰을 바라본다. 오늘 날짜를 확인한 다음 정확하게 숫자를 쓰고 빈 공간에 예쁜 하트를 그리면 완성이다. 기다리는 줄은 길 때도 있고 짧을 때도 있는데 이것이 글씨를 써내려가는 속도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 본인만의 흔들림 없는 속도로 성실하게 임무를 수행한다. 종이를 받아든 사람들의 얼굴에는 하나같이 행복한 미소가 번진다.
정 작가의 활발한 행보는 현재진행형이다. 최근 기사만 검색해도 금세 확인이 가능하다. ‘서촌 옥상화가’ 김미경 작가와 함께 꾸린 2인전 ‘인연 두 여자’가 12월 3일까지 열렸고 브라질 상파울루 주브라질한국문화원에서는 ‘어메이징 그레이스’라는 타이틀이 붙은 개인전이 2025년 2월 28일까지 열린다. 교육개발협력 전문 비정부기구(NGO) (사)호이에서는 정 작가의 작품이 담긴 달력을 증정하는 캠페인을 개최하고 뷰티 브랜드 정샘물과 협업해 특별 패키지를 내놓기도 했다. 장애인 인식 개선을 위한 강연 무대에도 수시로 선다. 사회적인 관계가 전혀 없었던 발달장애인 청년이 그림을 계기로 많은 사람과 관계를 맺고 어우러질 수 있었다. 그의 행보에 수많은 장애인과 가족들이 용기와 힘을 얻고 있다.
그림으로 연결된 세상
“그림을 혼자 그리는 게 아니라 동료 작가님들이랑 그려요. 아침 9시부터 오후 1시까지. 그림을 그리고 일도 하고 돈도 벌고 있어요. 그리고 주간 활동도 해요. 합창도 하고 뜨개질도 하고 야간 돌봄도 해요. 각자 매칭 선생님들이 있어서 그분들이랑 같이하고 있어요. 또 우리가 네 커플이 있어요. 그래서 ‘썸’도 타고 연애도 하고 있어요.”
속도는 느리지만 꼭 필요한 단어는 놓치지 않는 화법이었다. 강연, 방송의 경험이 많아서인지 분위기를 푸는 유머감각도 탁월하다. “(드라마에서 쌍둥이 동생으로 출연한) 한지민 언니도 연애 중이지만 저도 연애하고 있어요”, “사람들이 자꾸 저한테 결혼 언제 하냐고 질문을 하세요. 저도 서른넷인데”라면서 묻지 않은 근황도 척척 꺼낸다.
인터뷰는 정 작가의 모든 스케줄에 동행하는 어머니 장차현실 씨, 아버지 서동일 씨와 함께 진행했다. 기자와의 대화가 막히거나 부연 설명이 필요할 때 도와주는 역할이었다. 그림 활동을 통해 비로소 한 사람의 보통의 삶을 살아가게 된 딸을 대견하게 바라보는 눈빛에 이 가족이 보냈을 시간이 어렴풋이 느껴지는 듯했다.
2013년부터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정 작가는 요즘 경기 양평군에 있는 ‘어메이징 아웃사이더 아트센터’ 소속으로 활동하고 있다. 아웃사이더 아트는 정식 미술교육을 받지 않은 이들이 창작한 작품을 말한다. 발달장애 청년들이 모여 그림을 그리고 전시를 하면서 다양한 경험을 나누고 있다.
평범한 장애인이 되기까지
2025년 장애인 활동지원 예산안은 2조 5323억 원으로 2024년보다 2477억 원 늘어날 계획이다. 이러한 장애인 지원은 갑자기 확대된 것이 아니라 장애인과 사회가 함께 노력한 결과라 볼 수 있다. 일반 학교에 적응하지 못한 정 작가는 수없이 이사를 다녔고 대안학교에서도 적응을 못해 홈스쿨링을 선택했다.
문제는 정 작가가 스무 살이 되던 해 시작됐다. 발달장애 청년들이 갈 곳이 없었던 것이다. 아무도 만나지 않고 집에만 있으니 힘든 상황이 자주 일어났다. 시선 강박, 틱이 심해지고 조현병 증상도 보였다.
“스무 살부터 스물세 살까지 힘들었어요. 엄마도 힘들었어요. 제가 힘들어서 엄마도 뇌졸중이 오고 가족들도 무너졌어요. 그때 제 곁에는 항상 저를 지켜주던 지로(반려견)가 있었어요.”
장차현실 씨는 생계유지를 위해 작은 화실을 운영하기로 했다. 하루 종일 아무것도 하지 않는 딸이 딱해서 화실 아르바이트를 시켰는데 여기서 기적을 만났다. 생전 그림 교육을 받아본 적도 없던 딸의 그림 수준이 놀라웠다. 오스트리아 화가 에곤 실레를 연상케 하는 선이 동아줄로 느껴졌다. 딸의 재능을 확인한 그는 딸이 그림으로 세상과 손을 잡게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당시 집 근처인 양평 문호리에는 주말마다 플리마켓이 열리고 있었다. 2016년 정 작가는 여기서 ‘니얼굴’이라는 간판을 붙이고 캐리커처를 그려주는 일을 시작했다. 1년여 동안 1000명을 그렸고 지금까지 5000명 넘는 사람의 얼굴을 그렸다. 그 과정에서 기적 같은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그림 실력이 늘어난 것은 물론 틱, 말 더듬기, 시선 강박, 조현증 증상이 사라졌다. 사람들과 관계 맺기도 가능해졌다.
“‘우리들의 블루스’도 저한테는, 노희경 작가님이 저한테 큰 힘을 얻었고 저한테는 좋은 선물을 주셨어요.”
정 작가는 플리마켓에서 번 돈으로 첫 개인전을 열었다. 이후 서울문화재단 잠실창작스튜디오 입주 작가로 활동하면서 전시를 이어갔다. 노 작가가 우연히 전시를 보러 왔다가 정 작가를 만났고 그것이 인연이 돼 드라마 출연으로 이어졌다. 30대 발달장애인의 모습을 현실적으로 그려낸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는 정 작가의 인생을 확 바꾼 계기가 됐다. 화가로서 이름을 널리 알린 것은 물론 시설에 가지 않고 가족들과 함께 자립해서 사는 모습을 통해 장애인에 대한 사회적 환기를 유도하는 데도 성공했다. 장차현실 씨는 노 작가가 본인들에게 새로운 세상을 열어준 것처럼 정 작가에게 장애인이 살아갈 수 있는 창을 열어주라는 소명이 부여된 것 같다고 말했다.
실제로 정 작가는 그런 소명을 잘 수행하고 있는 중이다. 장차현실 씨가 에피소드를 들려줬다. 정 작가의 작업실은 양평 읍내의 상가 건물에 있다. 학원이 많아서 아이들도 많은데 예전에는 정 작가가 엘리베이터에 타면 아이들이 눈치를 보며 슬금슬금 도망치듯 벽에 붙었다고 한다. 드라마 출연으로 유명세를 탄 후로는 그런 일이 없어졌다. 웃으면서 바라보거나 먼저 인사를 건네기도 한다. 학원 쉬는 시간에 작업실로 찾아와 사인을 해달라는 요청도 한다. 제일 좋은 것은 정 작가뿐 아니라 다른 발달장애인들을 봐도 도망가지 않고 어울리며 자연스럽게 지내는 것이다. 엄마의 말을 듣고 있던 정 작가가 말했다.
“사람들이 저한테 멋있다고 훌륭하다고 좋은 말들을 해주세요. 저는 그럴 때 기분이 좋아요. 제가 그림 그리면서, 동료들과 같이 그리면서, 이런 게 다 행복이에요.”
임언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