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열을 인솔하는 독일 병정들이 갑자기 서두르기 시작했다. 빨 리, 빨리 이동하라고 아우성치듯 다그쳤다. 대열은 어디로 끌려가 는 지도 모르는 채, 그들의 재촉에 속절없이 쫓길 수밖에 없는 처지 였다. 놀라고 당황했던 탓이었을까. 급기야 어린 남동생이 그만 신 발 한 짝을 놓치고 말았다. 서둘다가 신발이 벗겨졌는데 그만 뒤쪽 에서 사람들이 밀어붙이는 바람에 그걸 찾아 신을 여유가 없었을 터다. 한 쪽 신발이 벗겨진 채 허둥대는 동생의 모습을 보고 난데없 이 화가 치밀었다. “넌 칠칠치 못하게 제 신발 하나 못 챙기니?” 결 국 동생을 까칠하게 할퀴고 만 꼴이었다. 속으로는 분명 맨발 신세 가 된 동생을 걱정하고 있었는데, 그래서 속상했는데, 동생이 안스 러웠는데, 말은 그만 함부로 쏜 화살처럼 튀어나가고 만 것이다. 그 러고나니 누구에게 향한 건지 도대체 알 수 없는 분노가 더욱 이글 댔다. 잠시 후 병사들이 갑작스레 대열을 나눠 다른 방향으로 끌고 가기 시작했다. 그 아수라장 속에서 그만 동생을 놓치고 말았다.
ⓒpixabay
소리 질러 동생을 찾았지만 허사였다. 신발도 제대로 못 신은 동생 을 끝내 찾을 수 없었다. 도리 없이 동생과 생이별한 채 끌려갔다. 그리고…… 그리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아 니, 기억할 수 없다. 분명한 것은 아우슈비츠의 생지옥을 가까스로 벗어나 살아남았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동생은…… 동생은, 아니었 다. 그곳을 벗어나지 못했다. 신발도 없이, 서둘러 지상에서의 삶을 너무나도 허무하게 끝내고 말았다. 숨 막히는 가스실에서 동생은 누이의 덧정 없는 말을 얼마나 원망했을까. 생과 사의 경계에서 동 생에게 마지막으로 한 말이 하필 그 모양이었다니. “넌 칠칠치 못하 게 제 신발 하나 못 챙기니?” 시간이 지나고 또 지나도 동생에게 미 안하다고 사과할 용기조차 나지 않는다. 도대체 왜 그랬을까? 확실 히 미쳤었던 모양이다.
아우슈비츠 생존자의 이야기다. 방송을 통해 이야기로 전해들은 것이지만, 그래서 특정한 영상도 없이 그저 듣기만 한 말이지만, 오 래도록 잊히지 않는 말이다. 그녀의 회한 어린 이야기를 들으면서 예전에 남쪽의 어느 절에서 보았던 그림이 떠올랐다. 명부전이었을까. 지옥도(地獄圖)가 있었다. 출생 연도 별로 죄를 지으면 간다는 지옥의 그림이었다. 그런데, 아뿔싸, 내 경우는 발설지옥(拔舌地獄) 이 아닌가. 혀가 길게 뽑혀 나와 땅에 질질 끌려 말할 수도, 먹을 수 도 없는 무한 고통을 반복해야 하는 지옥의 그림 앞에서 나는 꼼짝 도 할 수 없었다. 내 안의 심연에서 오래오래 웅크리고 있던 불안의 뿌리가 바로 저것이었을까. 말하고 글쓰는 것을 생업으로 삼고 있 는 나로서는 결코 무심히 넘길 일이 아니었다. 그렇지 않아도 남의 구설수를 두려워하는 섬약한 성정 때문에 늘 말 조심, 입 조심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살아온 터였지만, 혀가 뽑히는 지옥도를 본 다음 나의 불안기는 더욱 깊어만 같다. 그렇다고 해도 돌이켜 보면 좋은 말만 하고 살지는 못했던 것 같아 부끄럽고 불안하기는 여전하다.
홍성원의 소설 ‘무사와 악사’를 원용하여 생각해 보면, 사회적 관 계와 소통의 매개인 언어는 무기가 될 수도, 악기가 될 수도 있다. 남에게 상처를 주고 폭력을 행사하는 무기가 될 수도 있고, 반대로 남을 위로하고 공감하고 은혜롭게 하는 악기 같은 말을 할 수도 있 다는 것이다. 최선은 나에게나 남에게나 악기가 되는 경우이고, 최 악은 공히 무기가 되는 말이다. 그 중간에 나에게는 악기지만 남에 게는 무기가 되는 경우와 그 반대도 상정 가능하다. 앞의 아우슈비 츠 생존자의 경우 동생에게도 자신에게도 무기가 된 말 때문에 평 생을 고통 속에서 벗어나기 어려워한다. 또 한 해를 보내면서 남에 게 무기가 되는 말들을 함부로 내뱉지 않았는지 곰곰이 반성해본 다. 발설지옥에 가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글· 우찬제(서강대 교수·문학평론가) 2016.12.26
공감누리집의 콘텐츠 자료는 「공공누리 제4유형 : 출처표시 + 상업적 이용금지 + 변경금지」의 조건에 따라 자유롭게 이용이 가능합니다.
다만, 사진의 경우 제3자에게 저작권이 있으므로 사용할 수 없습니다.
콘텐츠 이용 시에는 출처를 반드시 표기해야 하며, 위반 시 저작권법 제37조 및 제138조에 따라 처벌될 수 있습니다.
[출처] 공감누리집(gonggam.korea.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