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쁜 버릇이 있다. 언젠가부터 운전을 하면서 짐짓 ‘생각하는 사람’ 흉내를 내는 게그것이다. 운전대를 오른손으로만 잡은 채, 왼손으로턱을 괴고 운전하는 일이 잦다. 가족이 염려하며 만류하는 바람에 요즘은 많이 고쳤지만, 한동안 ‘생각하는 운전자’ 행세를 많이 했던 것 같다. 돌발 상황에 취약할 수 있는, 그야말로 안전에서 멀어질 수 있는 나쁜 버릇임에 틀림없다.
ⓒpixabay
젊었을 때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로댕전에서 ‘생각하는 사람’을 보면서 오래 상념에 젖은 적이 있다. 그 무렵은 생각하기보다 실천적 행동이 중시되던 때였다. 그럼에도 지옥의 문 아래에서오른손으로 입 부분을 괸 채 깊은 생각에 빠져 있는 로댕의 작품은 숙고와 통찰의 어떤 경지를 암시하는 것 같아 인상적이었다. 실천하기 위한 생각, 실천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반성적 생각 등등 여러 생각들이 이어졌다. 어쩌면 그때의 느낌이 훗날 생각하는운전자 형상을 빚어냈는지도 모른다.
한참 시간이 지난 후 프랑스 파리의 로댕미술관에 가서 그 작품을 다시 보면서 더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어쩌면 ‘생각하는 사람’은 매우 고통스럽고 음울한 상황에 처해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런 상황을 견디며 영혼의 승화를 위한 도저한 성찰을 한다. 입을 떠받친 손과 팔 근육의 강한 인상이며, 눈 부분의 깊이가 새로웠다. 또 턱을 괴지 않고 입을 떠받친 것 또한 그랬다. 말을 하기보다더 많은 생각으로 영감을 길어내려는 성찰자의 결기 같은 것이 느껴졌다.
뭉크의 ‘멜랑콜리 : 해변에서’의 사내도 언뜻 보면 ‘생각하는 사람’을 닮았다. 그림 뒤쪽은 청춘 남녀가 해안가를 다정하게 걷는 풍경이다. 그런데 사내는 홀로 턱을 괸 채 음울한 생각에 잠겨 있다. 바다며 백사장, 노을 등 주변 풍경은 전반적으로 불안과 공포로 출렁인다. 멀리 시커먼 산세는 불안의 기운을 더더욱 깊게 한다. 혹시 사랑했던 연인을 상실한 것일까. 그래서 온 세상을 잃은 것 같은 슬픔, 세계가 곧 파국에 이를 것 같은 공포에 휘감긴 것일까.
ⓒpixabay
뭉크는 물론 로댕의 작품 역시 멜랑콜리에서 비롯된 것인지 모른다. 다만 한쪽은 비참한 파국으로 치닫는 형상이고,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은 영감에 가득 찬 상태로 나아갔다. ‘생각하는 사람’은 비록 아래를 집요하게 응시하지만, 역설적으로 승화의 예감을 갖게 한다.
누구에게나 고통과 슬픔은 있다. 쉽게 드러내고말로 표현할 수 없는 음울한 멜랑콜리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다만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어떤 이들은 그것을 깊이 있게 내면화해 웅숭깊게 형상화하는 창의적 예지를 보이고, 또 어떤 이들은 파국의 광기에 빠질 수도 있다. 아니다. 어쩌면 양극단처럼 보이는 그것은 내적인 쌍둥이인지도 모른다. 그만큼 멜랑콜리의 에너지는 복합적이고 역동적인 것 같다. 그러니 어느 한 지점, 한 순간의 상태나 풍경에 휘둘리거나 노여워하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그러나 그런 생각을 한다고 하더라도 그런 긍정적 생각대로만 살도록 두지 않는 것이 또 멜랑콜리인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가을비가 내린다. 안개가 시나브로 짙어진다. 가을이 깊어지면 멜랑콜리도 깊어지는 사람들도 있다. 올가을 나의 내면은 어떤 풍경의 프리즘을 보일 것인가. 로댕의 승화와 뭉크의 불안 사이 그 어디쯤일까. 그런 상념에 젖어들다 보니 부지불식간에 다시 왼손으로턱을 괸다. 갑자기 전면에서 초록 신호가 노랑으로 바뀐다. 앗, 이게 아니지, 다시 손을 운전대로가져간다. 나쁜 버릇은 쉬 고쳐지지 않는 것인가 보다.
글· 우찬제 (서강대 교수·문학평론가) 2016.10.03
공감누리집의 콘텐츠 자료는 「공공누리 제4유형 : 출처표시 + 상업적 이용금지 + 변경금지」의 조건에 따라 자유롭게 이용이 가능합니다.
다만, 사진의 경우 제3자에게 저작권이 있으므로 사용할 수 없습니다.
콘텐츠 이용 시에는 출처를 반드시 표기해야 하며, 위반 시 저작권법 제37조 및 제138조에 따라 처벌될 수 있습니다.
[출처] 공감누리집(gonggam.korea.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