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평사리에 왔다. 박경리 선생의 대하소설 〈토지〉가 발원된 경남 하동군 악양면 평사리. 마침 ‘토지문학제’ 기간이어서 참가자들로 북적인다. 대한민국 ‘문학 수도’를 천명한 하동군이 명예를 걸고 하는 가을 문화축제다. 가을비가 내리는 주말이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우선 점심 요기를 하러 주막에 들렀는데, 여러 곳에서 밀려온 사람들로 제법 분주하다. 토지에 곡식을 심고 가꾸어 추수해 배부르게 먹고 싶어 했던 〈토지〉 속 평사리 농민들의 옛 풍경들이 잠시 스쳐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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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참판댁에서 서남쪽을 내려다보면 아래로 평사리 너른 들판에 알곡들이 익어가고 그 너머로 섬진강이 유유히 흐른다. 논길을 걸어가는 일군의 관광객이 눈길을 끈다. 어디를 가는 것일까. 그 앞쪽에 맞춤하게 나란히 서 있는 두 그루의 소나무가 보인다. 아하, 그‘부부송(松)’을 보러 가는구나. 길상과 서희의 소나무라고 ‘스토리텔링’한 소나무 쪽으로 가서 기념 촬영이라도 하려나 보다. 어떤 이들은 굳이 길상과 서희를 떠올리지 않고 ‘연인송(松)’이라고 부르기도 한단다. 가을비에 평사리가 촉촉이 젖는다. 건너편 높은 산허리 쪽으로 안개가 유장한 사연을 머금은 듯 웅숭깊은 풍경을 연출한다.
시간이 제법 많이 흐르고 이제는 작품을 무대로 해 축제처럼 즐기는 곳이 되었지만, 실상 이 땅은 범상치 않은 이력이 숨어 흐르는 곳 아닌가. 최참판댁 일가의 흥망성쇠 이야기며, 동학의 전설적인 장수 김개주와 윤씨 부인의 사연이며 그로 해서 생긴 구천이(김환)의 한이며, 조준구에게 땅을 빼앗긴 서희의 한은 물론, 용이와 월선의 슬프면서도 아름답고 안타까우면서도 애틋한 사랑 이야기가 비롯된 곳도 이곳이다.
별당아씨가 차를 마시던 마루에서 하동 차를 마신다. 차맛이 깊고 향이 그윽하다. 작가 박경리 선생이 1969년부터 1994년까지 26년에 걸쳐 완성한 대작이 바로 소설 〈토지〉다. 작가로서의 운명을 걸고 쓴 작품이라고 말해도 좋을 이 기념비적인 작품은 일종의 윷놀이와도 같은 홈커밍 스토리다. 평사리의 집과 땅을 빼앗긴 서희가 북만주 용정 땅까지 멀리 밀려났다가 다시 평사리 집으로 돌아오는 이야기. 그 과정에서 평사리라는 장소는 진주, 서울, 용정 등지로 부챗살처럼 퍼졌다가 다시 평사리로 모아진다. 일찍이 호머의 〈오디세이아〉부터 집으로 돌아가는 이야기 전통은 유구하다. 집을 떠났다가 돌아가는 과정에서의 갖은 사연과 애환들이, 그 이야기의 주인공들을 단련하고 변화시킨다. 그러므로 집을 떠날 때의 그/그녀와는 다른 존재가 되어 돌아오게 마련이다. 서희와 길상을 비롯한 〈토지〉 속 평사리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길상의 존재 전이가 인상적이다. 최참판댁의 한갓 머슴으로 시작해 서희의 남편으로 돌아왔다고 해서 그런 게 아니다. 그는 누구보다 생명의 근원성과 인간사의 이율배반성에 대한 본원적 질문을 던지고, 거기에 답하기 위해 애쓴 인물이다. 그는 문제적 현실을 초극하고 지상적 평등의 이데올로기를 넘어서 우주적 용화 세계의 황홀경을 지향했다. 자신의 원력(願力)을 모아 도솔암에 관음탱화를 완성했을 때, 그가 돌아오고자 했던 자리가 어디인지를 이해하게 된다. 그 아름다움의 원천에 대해 소설 속 도솔암의 주지 소지감은 "원력을 걸지 않고는 그같이 그릴 수는 없지. 삶의 본질에 대한 원력이라면 슬픔과 외로움 아니겠나"라고 말한다. 이를 바탕으로길상의 아들 환국은 ‘창조는 생명’이라는 예술론을 개진하기에 이른다. 삶과 생명과 예술이 혼연일체를 이루는 순간이다. 이 순간을 응시하는 모든 시선과 원력들이 한데 모여 마지막에 〈토지〉는 ‘어둠의 발소리’를 뒤로한 채 ‘빛 속으로!’ 진입하게 된다.
그런 생각을 곱씹다가 저편으로 눈길을 주었다. 산허리의 안개 사이로 길상의 관음탱화 풍경이 어른거리는 듯했다.
글· 우찬제(서강대 교수·문학평론가) 2016.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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