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는 일의 특성에 따라 생활주기가 다르게 마련이다. 예컨대 주간지 기자들은 일주일을 주기로, 월간지 기자들은 한 달을 주기로 해서 살아간다. 대학에서 일하는 나는 6개월을 주기로 산다. 방학 때도 일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방학을 마치고 새 학기를 맞을 때면 몸과 마음이 자연스레 더 분주해진다. 새로운 콘텐츠로 새로운 학생들과 만나는 일은 분명 설레는 일이지만, 그보다 더 많은 부담감도 있는 게 사실이다. 학생 때는 방학이면 쉴 수 있는 시간이 있었는데, 학교의 일을 직업으로 삼은 이후에는 방학 때도 편히 쉴 수 있는 날이 거의 없었다. 가족과 거의 의무적으로 가야 하는 피서 여행을 제외한 나머지 시간들을 밀린 일을 처리하느라 골몰해야 했다. 너무 피곤해서 내일은 무조건 쉬어야지, 하고 생각할라치면 그 내일이 개강일인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아마도 능력이 부족한 탓이겠지만 시간은 늘 내 편이 아니었다. 그러다 보니 오해도 많이 받았다. 사정을 모르는 지인들은 대학에서 일하면 시간이 많을 텐데 무슨 말이냐고 핀잔을 주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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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학기도 휴식 없이 개강을 맞았다. 당연히 방학보다는 더 바쁜 첫날을 보냈다. 저녁을 먹고 다시 연구실로 돌아왔는데, 아니 이게 웬일인가. 한마디로 난장판이었다. 창가에 고이 기르던 동백 화분이 바닥으로 굴러떨어졌던 것이다. 화분은 산산조각 났고, 그 안의 흙이며 장식돌이 이리저리 흩어진 채 나뒹굴었다. 동백은 잔뿌리를 가늘게 떨며 널브러진 채 가쁜 숨을 내쉬었다. 2년 전 완도에 갔던 지인이 줄기 무늬가 아름다운 동백이라며 선물로 준 것이었다. 아직 꽃도 제대로 보지 못했는데, 그래서 더 공을 들이고 정을 준 화분이었는데, 그만 화분받침이 깨지면서 생긴 불상사였다. 서둘러 새 화분을 가져와 강요된 분갈이를 하며 동백에게 미안한 마음을 표했다. 떨어지면서 상처받았을 동백의 마음을 다 헤아릴 수는 없겠지만, 얼마나 놀라고 황망했을까 싶었다.
놀란 가슴을 추스르며 커피를 마셨다. 개강 첫날 이게 웬일이람. 그런 생각이 절로 들었다. 가을 학기가 험난할 징조일까 걱정도 생겼다. 여느 학기보다 스케줄이 빡빡하게 짜여 스트레스가 많았는데 시작부터 좋지 않다는 느낌이었다. 그러다 문득 춘향의 꿈 이야기를 떠올렸다. 변학도의 수청을 거절한 죄로 춘향은 목에 칼을 쓴 채 감옥에 갇힌 처지였다. 옥창(獄窓) 밖으로 앵두꽃이 떨어지더니 거울 복판이 깨어져 보이고, 문 위에 달려 있는 허수아비가 춘향의 꿈에 보인다. 이런 꿈을 꾸고 나서 춘향은 ‘나 죽을 꿈’이라며 수심으로 밤을 지새운다. 그 꿈을 영락없는 흉몽으로 해석한 것이다. 정황으로 봐도 그렇고 꿈의 분위기를 봐도 그럴 수밖에 없었을 터다. 그런데 봉사의 꿈풀이는 달랐다. “그 꿈 장히 좋다. 꽃이 떨어지니 능히 열매를 맺을 것이요, 거울이 깨어지니 어찌 큰 소리 한번 없겠는가. 문 위에 허수아비 달렸음은 만인이 다 우러러봄이라… 쌍가마 탈 꿈이로세. 걱정 마소. 머지않네.”
일종의 액땜이었을까. 앞으로 닥쳐올 액을 다른 가벼운 곤란으로 미리 겪음으로써 무사히 넘긴다는 의미의 액땜으로 받아들여도 좋을까, 춘향의 꿈과 더불어 떠올린 말이었다. 다행히 일주일이 지났는데 동백은 무사했다. 새 화분을 보면서 문득 어떤 경고와도 같은 생각이 솟아났다. 혹시 강의 콘텐츠를 새로운 것으로 충분히 업데이트하지 못한 것에 대한 경고? 깨진 화분이 던져준 경고를 겸허하게 받아들이기로 했다. 서둘러 강의용 파워포인트(PPT) 파일을 수정하기 시작했다.
글· 우찬제(서강대 교수·문학평론가) 2016.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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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공감누리집(gonggam.korea.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