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백산 자락에 서리가 내리면 영주의 가을은 사색에 잠긴다.
붉고 노란 기운이 절과 길을 감싸며 고즈넉함을 더한다.
국보와 보물이 가득한 영주 부석사는 오후 느지막이 들르면 좋은 산사다. 관광객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늦은 오후의 은행나무길은 한결 호젓하다. 부석사 당간지주 인근 은행나무길은 유홍준 선생이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서 ‘조선땅 최고의 명상로’ 중 한 곳으로 칭송한 곳이기도 하다.
소백산 일몰이 덧씌워진 부석사의 저녁예불 정경은 가슴 찡한 감동이다. 소백산자락 너머로 해가 지면 붉은 노을을 배경 삼아 마음마저 뒤흔드는 저녁 예불이 펼쳐진다.
순흥 선비촌 전통가옥서 설레는 하룻밤
오후 6시, 경내의 이방인들이 하산길을 재촉하면 스님 한 분이 범종루에서 소백산자락을 응시한 뒤 법고를 두드리기 시작한다.
연이어 목어와 운판의 두드림. 들짐승과 날짐승, 물짐승의 해탈을 염원하는 소리에 슬며시 모여든 사람들은 모두 입을 닫고 작은 미동도 멈춘다. 작은 의식에서 시작된 감동은 범종 소리가 산자락에 잔잔하게 울려 퍼지고 창호지 그림자 너머로 불경 소리가 새어나올 때까지 한동안 이어진다.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 저녁예불의 감동을 두 볼에 새겼으면, 순흥 문화유적에서 하룻밤 묵으며 옛 선비의 숨결까지 느껴본다. 이곳에는 선비촌, 소수서원, 소수박물관 등이 옹기종기 연결돼 있다.
영주 여행의 단골 코스였던 소수서원·부석사 코스는 선비촌이 들어서면서 더욱 여유로워졌다. 해우당고택, 두암고택 등 40여 채의 전통 한옥을 되살린 옛 양반집에는 안방마님방, 마당쇠방, 외동딸방, 사랑방 등이 고스란히 재현됐다. 오늘 하루 마당쇠가 되고, 마님이 돼 가슴 콩닥이며 설레는 밤을 청할 수 있다.
저잣거리에서 막걸리 한 사발 들이켠 뒤 숙소 대청마루에 앉아 오순도순 2차를 즐겨도 운치 있다. 방바닥도 뜨끈뜨끈하고, 아침 일찍 툇마루 문을 열면 소백산 비로봉 정기가 방안까지 스며든다.
선비촌은 최초의 사액서원이었다는 소수서원, 유교문화의 모든 것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소수박물관과 호흡과 사연을 같이한다. 소수서원 초입에는 순흥묵밥촌이 조성돼 있는데 40년 전통의 이곳 묵밥은 다시마를 우린 국물에 직접 만든 메밀묵을 쓱쓱 비벼 먹는 맛이 일품이다. 묵 쑤는 광경을 구경할 수 있으며 덤에도 인색하지 않다.
명승지가 된 부석사와 소수서원은 주말 북적거림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좀 더 한적한 가을 나들이를 원한다면 죽계계곡, 초암사로 향한다. 소수서원을 가로지르는 죽계천의 원류는 초암사로 이어지는 죽계계곡이다. 죽계계곡은 선현들이 오묘한 자연의 비경에 감탄하며 풍류를 노래했던 곳이라는데 그 맑은 물을 보면 시 한 수 읊조릴 기분이 나겠다.
죽계계곡의 상류에 소백산의 그윽한 정취로 가득 채워진 초암사가 자리 잡았다. 세속과 멀리한 한적한 사찰에는 비구니 스님 몇 분이 기거하고 있다. “들어와서 차 한 잔 마시며 몸 좀 녹이고 가라”는 한 노스님의 손짓에는 때묻지 않은 가을 기운이 스며들었다. 초암사에서 봉두암으로 오르면 웃는 돼지머리를 닮은 돼지바위가 놓여 있다. 돼지코를 만지면 복이 온다고 하여 새해 첫날이면 영주 주민들이 소원을 빌기 위해 찾는 곳이다.
소백산은 설악산 다음으로 단풍이 빨리 찾아오는 산이다. 소백산 비로봉 길목의 희방폭포로 오르는 길은 온통 붉고 노란빛의 향연이다. 폭포를 위로 하고 한 굽이 오르면 보이는 희방사는 한때 <훈민정음>의 원판과 <월인석보> 1,2권의 판목을 보존하고 있던 곳으로 절 입구에는 자연림이 우거져 있다. 소백산 어의계곡 단풍이 소박하다면 이곳 희방사 단풍은 화려함이 더하다.
된장마을 무수촌·물돌이마을서 맛보는 ‘옛가을’
단풍 구경 뒤 영주의 구수함에 제대로 빠지려면 콩 이야기 가득한 이산면 된장마을 무수촌으로 향한다. 마을 안에는 옹기가 가득하고, 처마 밑에 매달린 메주 너머로는 할머니들의 이야기가 두런두런 쏟아진다.
“‘말날’이나 ‘닭날’, 털 많은 짐승 있는 날에 장을 담그는 법인데 가족 중에 말띠, 닭띠가 있으면 또 그날은 피해야 하지.”
이 마을로 시집온 지 50년 됐다는 할머니는 콩 담그는 얘기를 하면서도 콩 찌는 데는 노하우가 필요하다며 가마솥 주걱을 놓지 않는다. 장작불 연기에 눈물을 흘리는 것인지, 95세 된 시어머니 얘기를 하며 훌쩍이는 것인지 분간이 되지 않는데 “메주 쑤고 남은 콩을 실에 꿰어놓았다가 먹으면 간식으로 최고”라며 꼬마들 손에 콩도 몇 개씩 쥐어준다. 콩이 묵직하게 크고, 간장을 덜 빼 달달한 맛이 나는 게 이 마을 된장의 특징이다. 이 일대 공기가 좋고 잡균이 들어가지 않아 청국장도 퀴퀴하지 않고 구수한 냄새가 난다.
가을과 함께 흐르는 낙동강 지류를 따라 문수면 물돌이마을도 들러본다. 안동 하회마을처럼 낙동강이 회돌아 나가는 이곳은 ‘무섬마을’로도 불리는데 아름다운 자연과 옛 고택이 그대로 보존된 곳이다. 선비촌에서 묵었던 해우당고택의 원조가 이곳에 남아 있다.
강줄기로 인해 외부와 단절됐던 이곳 마을에서 외지 여인들은 시집올 때와 죽어서 상여로 나갈 때 단 두 차례만 마을 밖으로 나갈 수 있었다고 한다. 마을 모래톱에서 건너편까지 외나무다리를 재현해 놓았는데 아슬아슬하게 건너는 재미가 있다. 이 다리는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에 뽑히기도 했다.
글과 사진·서영진(여행칼럼니스트) 2014.1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