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가 먼저 잠을 깨는, 죽변항에서 맞는 새벽은 다르다. ‘뚜웅’하는 뱃고동 소리, ‘덜그럭’거리며 수레 끄는 소리, 드럼통에 장작 타는 소리가 포구에 나직하게 깔린다.
배들이 그물을 걷어들이고 포구로 돌아올 무렵이면 사람들이 웅크린 몸을 움직이기 시작한다. 어판장 구석 장작불이 제법 타오를 무렵 수협 경매인의 호루라기 소리에 맞춰 모든 게 바쁘게 우왕좌왕한다. 물 좋은 생선을 구하러 나선 식당주인들부터 그 주인을 따라나선 백구까지. 하루 중 어판장이 가장 신명날 때다.
새벽녘 잡어들의 거래로 시작된 경매는 대게 경매가 본격적으로 이뤄지는 오전 9~10시 즈음까지 이어진다. 가장 북적거리는 때는 역시 대게 경매가 이뤄질 때다.
죽변항 골목 풍경은 전형적인 어촌
대게는 몸통 옆구리의 줄이 두 줄, ‘너도 대게’라는 별칭을 지닌 청게는 줄이 두 개에서 하나로 줄어든다. 살 대신 물이 가득한 2만~3만원짜리 물게들은 길거리 좌판으로 실려 나가고 10만원이 넘는 ‘명품 대게’들만 애지중지 대접을 받는다. 속이 알찬 대게의 속살은 짠맛이 아닌 단맛을 낸다. ‘고향’은 같아도 양으로만 따지면 울진 대게의 어획량이 영덕의 두 배 가까이 된다. 겨우내 울진 대게의 달콤한 맛을 즐길 수 있다.
경매가 끝난 뒤 한가로운 골목을 거닐면 사연은 파도처럼 넘실거린다. 죽변항은 수백 척의 배들이 오가는 분주한 포구다. 항구는 비대해졌지만 추억의 어촌마을 풍경은 골목마다, 전하는 얘기마다 담겨 있다.
죽변항 언덕에서 바라보는 일출이 일품
“예전에는 요앞 조선소에서 밍크고래가 많이 잡혔지예. 어렸을 적에 세숫대야에 고래고기 받아오느라고 줄을 섰어예. 맛있는 생선은 다 영주사람들이 사갔는데….” 이곳에 시집온 지 30년 됐다는 아주머니는 생선을 다듬으며 죽변항의 옛 기억에 빠져든다.
새로 문을 연 다방 앞에는 동네 아주머니가 보낸 플라스틱 화환이 세워져 있고, 낮술 한잔 걸치러 소주방에 모여든 사람들은 영덕 게보다 울진 게가 한 수 위라며 허름한 대게 식당들 자랑을 늘어놓는다. 사람 하나 간신히 오갈 수 있는 골목에서는 아주머니들이 가자미를 말리는 정겨운 모습이 보인다.
대게로 유명한 죽변항은 드라마 한 편으로 운치를 더했다. 드라마 <폭풍속으로>의 배경이 된 죽변항 언덕 위로는 죽변등대와 교회 등 세트장이 남아 있다. 봉우깨해변이 내려다보이는 이곳 절벽에서 바라보는 일출이 아름답다.
포구의 사연은 남쪽으로 내려가면서 잔비늘처럼 이어진다. 울진의 해변 길이는 82킬로미터나 된다. “옷만 벗으면 해수욕장”이라고 농담을 건넬 정도로 잘 알려지지 않은 해변들이 많다. 온양해변 앞에는 해녀들이 미역을 따는 모습이 드문드문 보인다. 큰 죽변항에서 벗어나자마자 ‘작은 삶’들이 자맥질을 하며 눈을 시리게 한다.
서울로 향하던 공물이 반출됐던 공석포구는 큰 자갈들을 섞어 마을 돌담을 쌓았다. 까막바위, 진바위를 눈앞에 둔 이곳 해변길에는 ‘파도가 높으니 길을 걷다 조심하라’는 표시판이 세워져있다. 공석마을에서는 1년에 몇 차례 정도 파도가 마을길을 덮치기도 한다.
삼척과 울진의 경계에 놓인 자그마한 고포항은 미역줄기 같은 숨은 얘기를 지녔다. 마당만 한 포구는 강원도와 경상북도로 갈린다. 골목을 기준으로 붉은 벽돌집은 강원도 삼척에 속해 있고 흰 벽돌집은 경북 울진 소속이다.
문패에 붙은 전화번호도 주소도 시작이 다르다. 미역 말리던 한 할머니는 “길 건너 이웃집에 전화할 때도 시외전화를 걸어야 된다”고 말문을 연다. 그 한적한 포구는 겨울이 되면 자연산 돌미역 때문에 분주해진다. 수심이 얕은 암석에서 자연적으로 생산되는 미역은 맛이 좋아 고려 때부터 왕실에 진상하기도 했다. 미역을 안주 삼아 소주잔을 기울이던 할아버지들은 “맛 좀 보고 가라”며 말리던 미역 한 귀퉁이를 툭 떼어준다. 달고 진한 맛이 혀 가장자리로 은은하게 스며든다.
스쳐 지나온 울진의 포구들이 망양정에서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왕피천과 동해가 만나는 곳에 관동팔경의 하나인 망양정이 위치했다. 조선 숙종은 ‘저 바다가 술이라면 하루 300잔만 마시겠느냐’는 시 한 수를 망양정 현판에 적어놓았다.
금강송 군락지를 거쳐 온천에 몸을 맡기다
울진여행은 바다와 함께 숲, 온천이 어우러져 더욱 즐겁다. 왕피천을 거슬러 불영계곡에서 통고산으로 이어지는 드라이브 길에는 볼 것이 아기자기하게 담겨 있다. 가을 단풍으로 유명한 36번 도로에는 겨울이면 눈이 소복이 내려앉는다. 도로 초입 내앞마을의 대나무길과 돌담길은 연인들이 한번쯤 들르는 단골 코스가 됐다. 내앞마을 앞에는 한옥구조로 된 100년 세월의 행곡교회도 자리 잡았다.
비구니 승려들의 사찰인 불영사를 지나면 36번 국도변 최대의 구경거리인 금강 소나무군락지가 모습을 드러낸다. 수십 미터를 올곧게 뻗어 자란 매끈한 금강 소나무 중에는 나이가 500살이 넘은 것들도 있다. 군락지 초입에는 예전 이곳의 나무들이 왕실전용으로 쓰인 것을 증명하는 황장봉계표석이 세워져 있다.
솔향을 흠뻑 마신 뒤 울진의 자랑거리인 백암온천이나 덕구온천에서 온천욕을 하면 몸은 차분해진다. 바다와 숲이 전하는 울진의 바람은 미역향기보다 진하고 푸르게 다가선다.
글과 사진·서영진(여행 칼럼니스트) 2014.12.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