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월 읍내에서 주천강을 거슬러 오른다. 한반도면을 지나 곧 강과 같은 이름을 간직한 주천면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옛날에 술이 솟아나는 샘이 있어 주천(酒泉)이라 불렸다 전한다. 술이 쌀로 빚는 것이니 옥토와 무관하지 않겠다. 강이 흘러 기름진 평야를 간직한 마을이다.
조견당은 김종길가옥으로도 잘 알려져 있는 고택이다. 지금은 주천고택 조견당으로 불린다.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71호다. 고택은 면의 중심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다. 면내를 관통하는 주천로에서 300∼400미터 거리다. 건물이 밀집한 지역을 벗어났는가 싶더니 어느새 고택이다.
과거에는 고택 그 자체가 주천의 중심이었다. 약 200년 남짓을 거슬러 오른다. 조견당은 1827년(순조 27년)에 현 주인장 김주태(53)씨의 10대조 김낙배가 지었다.
원래는 황해도 의주와 부산 동래를 오가며 무역을 통해 쌓은 부를 기반으로 40칸 규모의 집을 지을 계획이었다. 하지만 파당정치와 탐관오리의 횡포로 서민들의 굶주림이 심하던 시절이었다. 집을 짓는다는 소문이 퍼지자 각지에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그들을 외면할 수 없어 공사가 커졌다. 결국 120여 칸 규모의 큰 집이 들어섰다. 목재와 자재를 구하는 데 3년이 걸렸고 건축에만 6년이 소요돼 9년 만에 완공했다.
처음 지어질 당시 규모는 지금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조견당 남서쪽에는 주천강이 흐른다. 주변으로는 백사장에 선착장이 있었다. 과거에는 그 앞에 조견당의 행랑채가 위치할 정도로 엄청난 규모였다. 아쉽게도 일제 강점기에 제방을 쌓으면서 행랑채와 곳간채가 헐리고 말았다.
9년에 걸쳐 지은 120여 칸 한옥
안타까운 일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한국전쟁 당시 비행기 폭격으로 대부분의 건물이 소실됐다. 사랑채와 사당 등이 전부 사라졌다. 간신히 안채만 살아남았다. 안채를 중심으로 다시금 고택의 시간을 복원하는 중이다. 지난 2007년에는 사랑채를 복원했다. 2009년에는 그 곁에 다시 별채를 신축했다. 한옥 민박 체험을 시작한 것이 2012년이다. 1년밖에 되지 않았지만 꽤나 입소문이 났다.
도로에서 벗어나 고택을 향하는 고샅으로 접어든다. 조견당에 다다르자 한옥보다 먼저 시선을 끄는 존재가 있다. 담벼락의 모퉁이 바깥쪽에 자리한 500년 수령의 밤나무다. 마치 같은 밑동에서 자란 두 그루의 나무인 양 V자를 그린다. 대문 곁을 수호신처럼 지키고 섰다.
밤나무 뒤로는 긴 담이 이어져 사랑채에 가닿는다. 그 가운데 대문이 있고 다시 사랑채 끝에서 이어지는 담을 따라 또 하나의 문이 열린다. 별채로 열리는 끝의 문이 가장 많이 쓰이는 출입구다. 하지만 곧장 집안으로 들어서지는 않는다.
새벽별 같은 젊은이와 함께하는 집
조견당은 바깥에서 누릴 수 있는 경치가 있다. 담벼락과 나란한 정원이다. 수목과 돌들이 어우러진 쉼터다. 비스듬하게 뻗은 소나무의 가지 사이로는 담 너머 안채가 어른댄다. 그 또한 한 폭의 그림이다. 아껴서 음미하듯 정원을 어슬렁거린 후에야 대문을 연다. 큰 길에서 가장 먼 쪽의 문이다. 안으로 들어서자 별채와 사랑채 사이의 마당이다. 왼쪽의 별채는 ‘一’자형이다. 안주인이 기거하는 살림집이다. 오른쪽의 사랑채는 ‘ㄴ’자형으로 ‘ㄱ’자의 안채와 마주한다.
사랑채는 주인장 김주태씨가 특별히 효성재(曉星齋)라 이름 붙였다. ‘새벽별 같은 젊은이들이 미래를 준비하는 집’이라는 의미다.
그가 꾸려가는 조견당의 가치를 잘 드러낸다. 고택을 빌려 젊은이들과 교류하며 우리의 고유한 전통 문화를 공유하려는 의지다. 고택에서 머물기를 원하는 이들을 위한 숙소 역할을 한다. 별채를 마주한 바깥사랑채와 안채를 마주한 안사랑채로 이뤄지는데 각각 8칸과 5칸이다. 바깥사랑채는 너른 대청마루를 가진다. 차(茶) 손님들이 쉬어간다.
조견당은 숙박객에게만 개방되는 것이 아니다. 고택을 방문하는 모든 이에게 열려 있다. 하지만 쉽사리 들어서지 못하자 그 걸음을 가볍게 하기 위해 찻집 간판을 걸었다. 조금 더 편하게 머물며 둘러보고 쉬어가라는 안주인의 배려다. 사랑 마당에는 야외에 나무 의자와 탁자를 여럿 배치했다. 사랑채의 툇마루도 제법 넓다. 바깥 담 너머로는 산세가 유려하다. 담 안쪽의 솟대와 어우러져 수묵화 같은 풍경을 연출한다. 차를 마시며 천천히 누려봄직하다.
바깥사랑채를 돌아 안마당으로 들어선다. 비로소 고택의 역사를 제 몸에 아로새긴 안채다. 조견당에서 가장 오랜 시간 제자리를 지킨 건물이다. 조견당은 주천고택의 당호이자 안채의 이름이다. 그 의미는 불교의 <반야심경>에서 가져왔다. ‘조견오온개공(照見五蘊皆空)’으로 조견(照見)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 비춰본다’로 해석한다. 글자 그대로 읽으며 ‘비춰보는 집’이라는 의미도 찾을 수 있다.
안채 조견당은 낮은 기단 위에 세워졌다. ‘ㄱ’자형 모양으로 16칸 규모의 건물이다. 대청마루를 중심으로 사랑채 방향으로 꺾인 왼쪽에는 윗방과 안방, 사랑방, 부엌이 있다. 오른쪽으로는 조견당 현판이 걸린 건넌방과 부엌이 차례로 이어진다.
합각머리와 화방벽에 새긴 음양오행
대청마루에 올라서면 자연스레 대들보에 눈이 간다. 조견당의 역사를 지켜본 산증인이다. 직선으로 뻗은 것이 아니라 아치형으로 위아래를 깎았는데 그럼에도 여간 굵지 않다. 아니나 다를까. 애초에 800년 된 소나무를 다듬어 사용했다. 조견당의 역사가 200년이니 살아 800년, 죽어 200년으로 1천년을 살아낸 나무다.
마루 안쪽에 있는 뒤주도 눈여겨볼 만하다. 이 또한 만만치 않은 크기다. 무려 쌀 여덟 가마가 들어간다. 겨울에도 행랑 끝방에 불을 피우고 보리밥 한 그릇이라도 묻어두는, 조견당 인심의 상징이다. 조상께 치성을 드리던 안택의 흔적도 있다. 윗방과 안방 사이 바깥 기둥의 종이 성주다. 지금은 고인이 된 김주태씨의 어머니 고 김휘선씨가 달았다. 14년의 시간이 흘렀지만 안위의 기억으로 남겼다. 이 또한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집의 역사다.
안채는 대청마루에서 내려와 한 걸음 떨어져 바라봐도 좋다.
처마와 추녀의 유려함이 돋보인다. 한옥의 고운 선이다. 팔작지붕의 합각머리도 그냥 지나칠 수 없다. 다른 고택과 달리 조견당만의 문양을 수놓았다.
안채 동쪽의 해 모양 아래에는 화방벽도 아름답다. 우리의 전통색인 청·적·황·백·홍의 오방색을 띤 사괴석을 다듬어 쌓았다. 합각지붕 아래 음양과 화방벽의 오행은 음양오행의 유교적 가치를 표현한다. 단순한 건물이 아니라 철학을 실천하고 다짐하는 대상이다. 물론 조형미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답다.
동쪽의 해 문양과 화방벽을 확인한 후에는 안채 주변을 한바퀴 돌며 달과 별의 흔적도 찾아봄 직하다. 안채의 뒤편은 시간의 궤를 달리하는 두 건물의 처마다. 새로 지은 창고의 지붕이 안채에 머리를 맞댄다. 색다른 볼거리다. 그 옆으로는 가지런한 장독대의 행렬이다. 슬그머니 팔을 뻗는 호박넝쿨이다.
또한 바깥사랑채와 대문을 잇는 담 앞에는 키 큰 굴뚝과 소나무 한 그루가 조화롭다. 바깥 정원과 어울려 한층 멋스럽다.
그 품에서 묵어가는 하루다. 열린 공간 사이를 넘나드는 바람에 젖고, 귓가에 울려퍼지는 풍경 소리에 마음의 빗장을 연다. 모처럼의 조견(照見)이다.
글과 사진·박상준(여행작가)
‘고택에서의 하룻밤’은 221호를 마지막으로 연재를 마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