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대장은 ‘군대는 놀기 위해 소집된 사람들이 아니다. 대부분의 전투지에는 위안소를 설치하고 있다. 위안부를 둔다는 것은 오히려 당신들의 몸을 지켜주려는 뜻이 있으니 양해해달라’는 내용으로 장황하게 설득을 거듭했습니다.”
식민지 조선에서 태어나 일본군 위안부로 살아야 했던 할머니의 생생한 증언이 책 속에 녹아들었다. 최초로 위안부 피해 증언을 한배봉기(1914~1991년) 할머니의 이야기다. 이 책은 일본 작가 가와다 후미코가 10여 년간 배봉기 할머니를 만나며 취재한 70여 시간의 녹취 증언을 풀어 쓴 것이다.
1987년 일본에서 출간돼 반향을 일으킨 뒤 한국에서 1992년 출간된 바 있다. 이후 김학순 할머니를 비롯한 국내 피해자의 잇단 증언을 촉발했다. 이번에 새로운 번역으로 출간했다.
충남 예산 가난한 집의 딸로 태어나 1944년 “일하지 않고 돈을 벌 수 있는 데”, “나무 밑에 누워 입을 벌리고 있으면 저절로 바나나가 떨어지는 데”가 있다는 ‘여자 소개꾼’의 말에 속아 열차에 올랐다. 다른 여섯 명과 함께 옮겨진 ‘빨간 기와집’이 바로 일본군대가 운영하는 위안소였다.
식민지 한국 여성들이 일본의 만행으로 인권을 어떻게 유린당해 왔는지 그 어떤 연구보다도 깊고 생생하다. 군인 구락부의 이용요금과 시간도 계급마다 달리 정리돼 있다. 기가 찰 만큼 체계적인 통계로 밝혀지는 일본군 위안소는 위안부들에게는 그저 ‘현실’이었을 뿐이다.
전쟁이 끝나도 상처는 누룩 번지듯 퍼져 있었다. 그는 생계를 위해 술집에서 성접대도 했다.
“봉기 씨는 하루에도 몇 명씩 군인을 상대했던 ‘빨간 기와집’보다도 민간 술집에 어쩌다 찾아오는 손님을 상대하는 게 훨씬 더 괴로웠다고 했다. ‘빨간 기와집’에서는 성매매가 여자들의 성만을 대상으로 삼은 데 비해 민간에서는 매춘이 용모나 감정, 색향 등 다양한 여성성으로 확장되었다.” 성접대 여성들에게 가장 큰 두려움은 자신의 존재 가치가 사라져버리는 일이었다.
1992년부터 위안부 할머니들이 일본 대사관 앞에서 여는 수요집회는 1,100회를 훌쩍 넘겼다.
평균 연령은 87.2세, 54명밖에 남지 않은 생존 할머니들의 시위에도 이 지난한 싸움은 여전하다. “우리는 아직 전쟁이 끝나지 않았다”고 말하는 일본군 위안부들의 절규가 책 행간마다 절절하게 스며 있다. 무관심 속에 스러지고 묻혀져 가는 역사의 상흔이 깊기만 하다.
배봉기 씨가 시냇물에 빨래를 헹구며 즐겨 불렀다는 노래의 가사는 너무 아름다워 가슴이 아프기까지 하다. ‘내 고향 아리땁고 얌전한 아가씨는 여름이면 오이로 김치도 잘 담그고 음식 솜씨도 좋은 부지런히 일하는 알뜰한 살림꾼. 언젠가 아들도 낳고 딸도 낳겠지 얌전하고 아리따운 아가씨.’ 전쟁이 아니었다면 아리따운 아가씨로 살아봤을 법한 한 여인의 기구한 운명이 그 어떤 드라마보다도 슬프다.
글·박지현 기자 2014.10.13
단신
<늘 푸른소나무>
정동주 지음 | 한길사 | 2만원
한국 사람들은 사계절 푸름을 뽐내며 꼿꼿하게 서 있는 소나무를 유독 아낀다. 소나무에 대해 깊은 성찰을 보여줬던 저자는 한국인의 심성과 소나무와의 특별한 관계에 주목한다. 소나무가 서 있는 마을마다 삶의 나이테로 스며 있는 애환, 소나무 한 그루에 깃들어 있는 세상 이야기, 식물학으로서의 소나무 이론, 한국인의 기상을 만들어온 솔그늘과 솔바람의 멋과 풍류를 오롯이 담아냈다.
<다음 인간>
이나미 지음 | 시공사 | 1만3천원
기술과 환경 변화가 인간의 심리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앞으로 나타날 ‘다음 인간’의 모습은 어떠한지를 이야기하는 책이다. 정신과 의사이자 분석심리학자인 저자는 지나치게 아름다운 미래를 제시하면서 현재의 모순에 눈을 감게 만드는 태도를 지양한다. 다양한 시나리오를 구상하며 어떤 미래가 다가올지 냉정하게 예측해 보는 미래 연구서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