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에 단 여섯 번만 기차가 서는 역이 있다. 화본역, 이름도 생소하다. 화본역이 있는 경북 군위군도 생소하기는 마찬가지다. 청량리행 열차 1번, 강릉행 열차 2번, 이렇게 상행 3회와 부전행(부산) 열차 1번, 동대구행 열차 2번, 이렇게 하행 3회의 열차가 화본역에 잠시 멈추어 섰다 간다. 청량리에서 화본으로 가는 열차는 하루에 딱 한 번, 오전 8시 25분에 있다.
여행은 목적지에 도착하면서부터가 아니라 열차를 잡아탄 그 순간부터 곧바로 시작된다. 사람 드문 평일의 한산한 기차 칸, 4시간이 조금 더 걸리는 오전의 열차여행은 생각보다 더 낭만적이다. 이틀 연속 내린 눈 덕에 두 눈은 자연스레 온통 눈 세상인 창밖으로 던져진다. 졸다 깨다 하며 바라보는 기차 밖 세상은 스크린 속 상영되는 영화처럼 저대로 흘러가고 기차도 쉼 없이 무시로 펼쳐진 풍경을 훑고 간다.
풍경은 나에게로 왔다가 다시 흩어진다. 지나간 풍경에 아쉬움을 남길 새도 없이 시시각각 새로운 풍경이 펼쳐진다. 기차 안에서 보는 세계는 이채롭다. 한시도 멈추지 않는 바깥 풍경과 그와는 대조적으로 마치 정지된 장면처럼 보이는 기차 안. 그 사이에 이쪽의 세계와 저쪽의 세상을 무시로 넘나드는 내가 있다.
오전 8시 반경에 탄 열차는 낮 12시 40분이 되자 여행자를 화본역에 살포시 내려준다. 그러곤 인사할 겨를도 없이 훌쩍 떠나가 버린다. 기차 안에서 화본역을 바라보는 사람 중 몇몇은 곧잘 “아~ 이런 역에 내려보고 싶다”고 말을 하지만 막상 화본역에 내리는 사람은 많지 않다. 겨울이라 더 그렇다. TV예능프로그램인 <1박 2일>에 등장한 다음부터는 날 좋은 주말이면 하루에 2천~3천명도 다녀가는 제법 유명한 역이 됐다고는 하지만 겨울의 평일은 그저 한산할 뿐이다.
옛 관사 방에 누워 듣는 기차소리
내리는 사람이 많지 않아서 더 고즈넉한 시골역. 1936년에 지어진 작은 시골역사는 아담하고 다정하다. 2011년에 산뜻한 모습으로 리모델링을 마친 역사의 모습은 아주 옛것 그대로라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으리으리하게 지어진 신축 역사의 모습이 눈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화본역의 아기자기함이 정겹지 않을 수 없다.
난로가 놓인 대합실과 철길을 그대로 넘어 기차를 탈 수 있는 얼마 남지 않은 기차역이다.
“객차는 하루 여섯 번밖에 운행을 안 하지만 화본역을 멈추지 않고 지나가는 객차와 화물차까지 합치면 하루 45대의 기차가 화본역을 거쳐가지요. 절대로 간이역이 아니라고요.”
하루에 기차가 몇 편 서지 않는 데다 옛 모습을 간직한 역사만 보고 “간이역이 참 예쁘다”고 말하는 관광객들에게 억울하다는 듯 던지는 역무원의 말이다. 일단 한 대라도 객차가 멈추는 역이니 간이역이 아님은 분명하다.
옛날 증기기관차가 다니던 시절, 기차에 물을 댈 때 사용하던 급수탑도 높다랗게 그 위용을 자랑하며 서 있다. 지금은 마치 육지 한가운데 솟은 등대라도 되는 양 관광객의 사진포인트로 애용되고 있다. 승강장 옆으로는 폐차한 기차를 이용해 만든 레일카페도 있다. 화본역에 많은 사람이 다녀가고 있음을 눈치채게 만드는 곳이다. 차 한 잔 마시며 기차에서 못다한 낭만을 마저 누려보는 공간이다.
화본역 옆에는 작은 마을도 있다. 역과 마을이 붙어 있다. 아니 작은 마을 속에 그보다 더 작은 역이 들어와 있다. 마을의 어느 집에서나 열차가 오고가는 소리가 들린다. 옛 일본식 가옥을 그대로 살려놓은 관사에서 하룻밤을 청했는데(옛 역무원들의 관사를 지금은 리모델링해 여행자들을 위한 숙박 시설로 활용하고 있다), 방에 누워 있으면 한밤중에도 역사의 안내방송과 기차 지나는 소리가 먼 발치에서 들려온다.
열차는 ‘칙칙폭폭’ 가기도 하고 ‘철퍼덕철퍼덕’ 가기도 한다. 듣는 사람의 기분에 따라, 또 열차의 기분에 따라. 하지만 그 소리가 전혀 소음으로 들리지 않는다. 오히려 “잘자라~ 잘자라~” 어릴 적 엄마가 불러주던 자장가처럼 들리기도 하고 악기 연주소리 같기도 하다.
계곡의 폭포소리나 바다의 파도소리처럼 하나도 거슬리지 않는다. 방안에 누워서 듣는 기차소리라니 얼마나 이색적인지.
화본마을은 역을 중심으로 길다랗게 늘어서 있다. 마을을 관통하는 유일한 도로가 가장 번화한 거리다. 번화해 봤자 하루종일 오가는 사람 몇 마주치기 어렵다. 이곳의 정식 주소는 경상북도 군위군 성산면 화본리로 화본마을이라는 이름을 가진 작은 마을이면서 성산면의 소재지 역할도 한다.
작은 마을이 주는 쓸쓸함도 낭만이 되어
그래서 화본마을에는 없는 게 없다. 파출소, 우체국, 은행, 면사무소, 정미소, 전파사, 교회, 찻집, 미용실, 중국집, 구멍가게부터 초등학교와 중학교까지. 아니 얼마 전까지도 없는 게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없는 게 있다. 초등학교와 중학교 모두 화본마을에서 사라졌다. 건물은 그대로 남아 있지만 학생도 없고 선생도 없다. 중학교는 몇 년 전 폐교되어 과거를 추억하는 박물관이 되었고 초등학교도 지난해 몇 명의 마지막 졸업생을 끝으로 폐교되고 말았다.
더 이상은 아이들의 웃음소리, 울음소리, 공 차는 소리를 들을 수 없는 마을이 된 것이다. 슬프지만 어쩔 수 없는 작은 시골마을의 현실이다. 처음 온 도시사람 눈에도 자명하게 보이는 시골의 현실. 그런 것들을 느끼면서 쓸쓸히 학교 운동장을 걷는 일마저 여행자에게는 그저 낭만이 되고 말겠지만.
현재 마을에는 100여 가구에 200명 남짓한 인구가 살고 있다.
마을을 한 바퀴 도는 데 10분이면 족할 정도로 마을은 아담하다. 영화나 드라마의 세트장 안에 들어와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착각도 든다.
미국의 대표적인 여류화가 조지아 오키프는 말했다. “아무도 꽃을 보려고 하지 않는다.
꽃은 작고, 들여다보는 일에는 시간이 걸리니까”라고. 그래, 작은 꽃은 물론 내 마음 한 자락 들여다보는 일에도 시간은 필요하다. 시간은 늘 내 것인 양 곁에 널려 있는 것 같지만 정작 내가 원하는 대로 쓸 수 있는 시간은 얼마나 되는지 자문해 본다.
노동을 위한 충전이 아닌 ‘나’를 위한 ‘쉼’
인생이 찢겨나간 달력처럼 그렇게 한순간에 허무하게 끝나지는 않으리라는 믿음으로 새해를 맞은 1월에야 비로소 스스로와의 대화를 시도해 본다.
하나도 특별할 것 없는 기차 여행, 시골마을 여행이지만 부러 완행선을 골라 타고 부러 작은 마을을 찾아들어가 무시로 지나는 창밖의 풍경과 사람들을 스쳐 보내며 지난했던 한 해도 그렇게 스쳐 보내 보는 것이다.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보고 들으려 할 때 비로소 치유가 시작되는 것처럼 지난 시간들을 곱씹어 보는 것만으로 그것들이 조금쯤 정리되는 것을 느낄 수도 있겠다.
이번 여행은 오로지 그대로의 나를 위한 여행이다. 미래를 위해 투자되어야 하는 시간으로서의 지금이 아니라, 내일의 노동력을 준비하기 위한 충전으로서의 여행이 아니라 내 존재 그 자체에 순수하게 바치는 쉼‘ ’의 시간이다. 별일 없는 특별한 시간이다.
글과 사진·이송이(여행작가) 2014.01.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