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 만에 만난 후배는 배가 산처럼 부풀어 있었다. 이렇게 엄청난 뉴스를 갖고 올 거면서 고작 팥빙수 먹자는 소리만 한 거냐고, 나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놀라게 해주려고요. 곱게 갈린 빙수를 살금살금 수저로 뜨면서 후배는 웃었다.
“그래서 말인데, 선배가 아기 이름 좀 지어주세요. 다음 주가 출산 예정일인데 아직도 마음에 드는 이름이 없어요.”
예전에 동양 사주니 서양 점성술 같은 것에 심취해 한두 마디 싱거운 소리를 했던 것을 기억한 모양이다. 하지만 정작 가족들도 조카 이름 지을 때 내가 지은 이름을 외면했건만…. 작명료까지 언급하며 진지하게 부탁해오는 태도가 되레 고마웠다. 아기를 향한 엄마의 마음이겠거니 생각하니 가슴이 살짝 뭉클해졌다.
태명은 ‘단주’라고 했다. 왜 단주인가 했더니, 아기아빠가 술을 끊고 나서(斷酒) 생겼기 때문이란다. 길게 묻기는 거북했다. 다만 후배가 이혼까지 염두에 넣고 고민했던 과거의 순간들이 뇌리를 스쳤다. 이전과는 다르게 살아보겠다는 아빠의 각오에 힘을 실어주는 아기라니, 갸륵할 뿐이다. 뱃속에서부터 효녀 노릇을 하고 있지 않은가.
그동안 생각해본 이름들을 참고삼아 물었다. 이안, 소린, 아라, 여름, 은새, 이솔, 제나, 지안…. 요즘에 예쁘다고들 하는 이름은 다 나왔다. 하지만 난처하게도 내 마음에 그리 와 닿지가 않았다. 예쁜 이름보다는 의젓한 이름. 두드러지는 이름보다는 심상한 이름. 하지만 진부하지는 않은 이름. 이름만 봐도 출생 시기가 가늠되는 이름보다는, 이름만 가지고는 언제 적 사람인지 짐작이 안 되는 이름. 그런 이름을 지어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나는 작명의 신고전주의자였나 보다.
“원래 복이라는 게 경박함을 피하고 온후함을 따르거든. 사실 이것만 잘 이해해도 길흉화복의 원리를 다 아는 셈이야. 옛날 어르신들이 하는 말 있잖아. 문지방에 앉지 마라. 이런 말과도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어.”
“근데 문지방에 앉는 게 요즘 사람들이 좋아하는 엣지(edge) 아녜요?”
후배는 ‘옛날 사람 인증’ 했다며 나를 놀렸다. 나도 따라 웃었다. 감각적으로 튀고 도드라지는 것을 좋아하는 세태에서 혼자 낡은 미감을 좇고 있는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출산 예정일이 단오와 하지 사이니, 아기 별명은 ‘감자’라고 하자고 말하며 자리를 마무리했다. 연중 가장 튼실하고 훌륭한 감자가 나온다는 철이다. 아기도 그럴 것임에 틀림없었다.
작명 작업은 동서양의 역법으로 두루 짚어본 다음, 아기의 개성을 돋보이게 해주는 글자들을 찾고, 반대로 아기의 약점을 보완해주는 글자들을 찾는 식으로 진행되었다. 후보작들이 생긴 다음에는 이름의 소리를 따지고, 연상(聯想)을 곱씹고, 자형(字形)을 살폈다. 이 과정에서 탈락한 이름들이 대부분이라, 아기엄마와 최종 결과를 놓고 통화를 할 즈음에는 고르고 자시고 할 수도 없게 되었다.
“율이라고요? 김율?”
“응. 한자는 ‘가락 율(律)’도 되고 ‘맑을 율(申)’도 되는데, 내 마음에는 가락 율이 조금 더 좋아. 물결치는 이미지가 아기에게 잘 어울리고, 타고난 예술적 감수성을 돋보이게 해주는 면도 있고.”
출생신고를 하러 가겠다는 후배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내 마음도 그랬다. 한 사람의 인생이 막 피어나는 순간을 함께한 것이다. 가족들도 외면한 아마추어 작명가가 데뷔를 한 셈이기도 했다. 단주에서 감자, 마침내 율이가 된 아기와 마음속으로 첫인사를 나눴다. 해피 버스데이, 김율!
구승준│번역가·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