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가 핑 돌 것 같은 햇빛이다. 하지만 맹렬할 뿐이지 뜨겁지는 않다. 아직은 덜 여문 것이다. 8월의 농익은 태양이 아니다. 하지만 여름의 돌격조(?)답게 기세로는 최고다. 하지에 이르러 남중고도(南中高度)가 연중 최고조에 도달한 태양은, 지상의 모든 것을 향해 수직낙하에 가까운 햇살을 쏘아댄다. 밋밋하던 일상의 빛깔이 날선 태양빛을 받아 이질적인 색감을 토해낸다. 마치 테크니컬러 영화 속 풍경 같다. 하늘은 새된 파란색이 되고, 구름은 빨랫줄에 걸어놓은 옥양목 홑이불처럼 눈부시다. 눈이 저절로 가늘게 떠진다. 가벼운 현기증마저 인다.
지난주, 뵤도인(平等院)에 다녀왔다. 10엔짜리 일본 동전 뒷면에 등장하는 절.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명승지이자 일본 중고생들의 수학여행 필수 코스. 뵤도인은 일본 교토 외곽의 소도시 우지(宇治)에 있는 사찰이다. 1052년 헤이안 시대의 한 귀족 자제가 아버지의 별장을 물려받아서 사찰로 개축했다는 설립 스토리가 전하는 만큼, 유산계급의 연회와 휴양에 최적화된 수려한 풍광이 감탄을 자아낸다. 하지만 아들은 아버지가 매료됐던 감각적이고 세속적인 경치의 의미를 한가로운 여흥에서 심오한 종교적인 열정으로 바꾸었다.
<속본조왕생전(續本朝往生傳)>이라는 헤이안 시대의 책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극락이 의심스럽다면 우지의 절을 믿어라.” 불교의 서방정토를 믿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지상에 현현한 극락정토를 보여줌으로써 신앙심을 고취하는 것. 이것이 뵤도인 주위를 흐르는 우지천을 끌어와 연못을 만들고, 그 한가운데 인공 섬을 조성해 아미타당(阿彌陀堂)을 세운 옛사람의 마음이었던가 보다. 과연 수련이 만개한 여름날, 금빛으로 단장한 아미타당의 자태는 뭇사람의 넋을 잃게 만들었을 법하다. 금박주청이 소실된 오늘날의 모습만으로도, 호수에 데칼코마니로 비친 신비롭고 고졸한 아름다움이 오래도록 마음을 파고든다.
청명한 하늘 아래, 세일러 칼라가 달린 교복을 입은 여학생들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사찰의 넓은 정원을 돌아보았다. 봄의 여린 잎들이 단단해지고 두터워져서 경내 풍경에 짙은 녹음을 드리웠다. 그 초록빛을 배경 삼아 사찰의 기둥이며 서까래를 단장한 일본 특유의 금적색(金赤色)이 쨍하게 도드라졌다. 맹렬한 테크니컬러. 어른어른한 빛깔에 놀라 안구의 조리개가 바짝 움츠러든다.
오즈 야스지로의 영화 ‘동경 이야기’는 봄부터 여름 사이의 계절을 다룬다. 밝은 광선으로 화면을 하얗게 날려버리고 실내의 밝기를 떨어뜨림으로써 오즈는 초여름의 더위를 표현했다. 눈부시게 청명한 여름날이 영화 내내 평온하면서도 무심하게 이어진다. 자주 회자되는 인상적인 장면도 있다. 아내가 막 숨을 거둔 뒤, 노인은 집 밖을 나와 말없이 오노미치항을 내려다본다. 며느리가 다가오며 “아버님, 케이조(막내아들)가 왔어요” 하며 알리자, 그가 답한다. “그렇구나. 참으로 아름다운 새벽이었다. 아, 오늘도 덥겠구나.” 영화학자 데이비드 보드웰이 말한 “오즈의 연민 어린 무심함”이라는 알쏭달쏭한 말의 의미가 설명 없이도 새겨지는 대목이다. 우지의 뵤도인을 걷다가 나는 무심코 ‘동경 이야기’의 계절이 콕 집어서 하지 무렵일 것이라는 근거 없는 확신에 빠져들었다. 영화가 표현하는, 수직으로 인체를 공격하는 그 잔인하고 황홀한 햇빛의 감각. 그것은 봄도 아니고 여름도 아니고 꼭 하지(夏至)만의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청개구리가 울고 지렁이가 땅에서 나온다.” 우리 조상들은 하지에 대해 이렇게 썼다. 하지에 태양은 가장 높이 떠오르고, 그림자는 가장 짧아지며, 삶의 비애는 감출 곳이 없다. 그리고 땅속 깊은 곳에서 감자는 날마다 무럭무럭 살이 찐다. 마치 마그마처럼. 태양 에너지가 축적되는 것이다. 여름이 시작되는 것이다.
구승준│번역가·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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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공감누리집(gonggam.korea.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