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나단 리빙스턴 시걸(Jonathan Livingston Seagull). 아직도 이 긴 이름을 외우는 사람이 있을까. 기억을 돕기 위해 힌트 하나를 끄집어내본다. 쪽빛 바탕색 위에 새하얀 날개를 활짝 펼친 갈매기 한 마리. 우리 출판 디자인이 걸음마 단계에 불과했던 시절이었으나, 문예출판사판 <갈매기의 꿈> 표지는 어린 중학생이 보기에도 청신하고 세련된 멋이 넘쳤다. 예뻐서 손바닥으로 슬며시 쓸어본 적도 자주 있었다. 한국어판 제목 옆에 병기된 영문 원제를 천천히 발음해보면서. ‘조나단 리빙스턴 시걸’ 박하 잎을 깨문 것처럼 싱그러운 설렘과 아릿한 자유의 맛이 온몸으로 번졌다.
그 <갈매기의 꿈>을 최근에 다시 만났다. 이번엔 책이 아니라 영화다. 사실 이 소설을 원작으로 삼은 영화가 있다는 건 중학생 시절에도 들어서 알고 있었다. 영화음악만 골라서 들려주는 라디오 프로그램의 애청자였던 덕이다. 아직도 라디오 디제이의 멘트가 귀에 쟁쟁하다. “리처드 바크의 베스트셀러 소설을 원작으로 삼은 영화죠. 영화 ‘갈매기의 꿈’의 주제곡 ‘비(Be)’, 닐 다이아몬드의 음성으로 들으시겠습니다.”
하지만 영화 ‘갈매기의 꿈’을 보기 위해 TV 앞에 앉은 나의 호기심은 사실 짓궂은 쪽이었다. 아무리 세계적인 원작이라지만, 영화음악으로 골든글로브 음악상에 그래미상 최우수영화앨범상을 받았다지만, 영화는 내용에서는 컬트일 수밖에 없고 흥행에서는 망조가 들었을 거라고 (무려) 중학생 때부터 확신에 찬 단정을 하고 있었다.
뭐 어마어마한 추측도 아니다. 누가 갈매기에게 연기를 시키랴? 고뇌하는 갈매기, 울부짖는 갈매기, 만류하는 갈매기, 저항하는 갈매기, 비웃는 갈매기… 각각의 몸짓과 표정을 상상할 수 있는가? 하지만 누구나 뜯어말리는 프로젝트에 홀 버틀렛이라는 젊은 감독은 사비를 털어가며 매달렸고, 그 결과 완벽한 파산에 이르러 다시는 재기하지 못했다. 히치콕 감독의 영화 ‘새’의 담당 조련사를 영입하는 노력까지 기울였지만, 갈매기가 하늘 높이 비상했다가 바닷물로 추락하는 스턴트 연기를 시키는 것까지가 그의 최선이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본능을 거스른 갈매기들의 연기 투혼에는 깊은 경의를 표한다. 오늘날이었다면 동물 학대 혐의로 이런 수준의 연기조차 불가능했으리라).
어쩌면 나는 ‘갈매기의 꿈’을 영화로 만들었다는 걸, 보기 전에는 도무지 믿을 수가 없어서 이 영화를 봤는지도 모르겠다. 90여 분이라는 짧은 러닝타임 동안 내내 혼잣말을 반복했다. “정말 이상하네. 이 정도면 감독도 알아차렸을 텐데. 아, 이 영화 안 되겠구나, 절대 안 되겠구나….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안 접고 끝까지 만든 거지?”
영화 안에서 갈매기 조나단 리빙스턴이 그저 먹이를 구하려고 날아오르는 동료들에게 다른 삶도 있다는 걸 보여주며 눈부시게 비상하는 동안, 영화 밖에서 또 다른 갈매기 홀 바틀렛은 물질세계의 냉혹한 벽에 부딪쳐 참혹하게 추락했다. 원작 소설 속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 “대부분의 갈매기들이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나는 것이 아니라 먹이를 구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갈매기에게는 먹는 게 문제가 아니라 나는 게 문제였다. 무엇보다도 조나단은 나는 것을 사랑했다.”
아아, 먹는 것과 나는 것을 이렇게 꼭 대립항으로 놓아야 하나? 어릴 적엔 무척이나 공감하고 음미했던 문장이 의심스러워졌다. 먹는 것과 나는 것이 서로를 존중하고, 서로에게 제발 겸손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주인공 조나단이 그리 지혜로워 보이지도 않았다. ‘가장 높이 나는 새가 가장 멀리 본다’는 명대사도 그렇지 않나. 나는 리처드 바크의 문장을 강은교의 시로 되돌려주고 싶다. ‘가장 큰 하늘은 언제나 그대 등 뒤에 있다.’
구승준│번역가·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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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공감누리집(gonggam.korea.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