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히 TV에서, 모 아파트 주민들이 서로 돌아가며 이웃을 초대해 밥을 나눠 먹는 ‘공동체 문화 실험’을 한다는 내용의 다큐멘터리를 보았다. 실험의 취지는 대번에 짐작이 갔다. 도심 아파트 문화의 익명성과 비인간성은, 흔히 자기는 쏙 빠진 유체이탈 화법으로 귀에 못이 박히게 질타당해왔다. “옆집에서 누가 죽어나가도 모른다니 이게 사람 사는 세상인가요”, “평소에 아무 소통이 없으니 층간 소음 갖고도 살인이 나죠” 등등.
실험 결과는 (주최 측 기대에 맞게) 흐뭇하게 드러났다. 밥 한 끼 함께한 것만으로도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치는 눈빛이 순해지고, 901호 아줌마, 204호 할아버지 식이던 호칭이 이모니 삼촌 식으로 친근해졌으며, 아이들이 한 집에 모여 숙제를 하거나 음식을 나눠 먹는 정다운 문화가 생겼다고 실험 참가자들은 한목소리를 내며 즐거워했다.
정말일까. 나는 내심 궁금했다. 명절에 가족끼리 만나도 식당에서 한 끼 때우는 게 편하다는 세상이다. 집에 초대해서 밥을 함께 먹는다니, 나는 생각만 해도 머릿속이 번잡한데 TV 속의 저 사람들은 안 그렇다는 말인가. 내가 까칠하고 못난 걸까, 아니면 저들이 내숭을 떠는 걸까.
나는 어느 쪽이냐면, 도시의 익명성과 소외에 길들여진 사람이다. 이웃끼리 웬만하면 친하게 지내라는 말씀은 국조(國祖) 단군에서부터 동서고금의 성현들, 현대의 위정자들까지 줄기차게 해왔지만, 인구 1000만이 넘는 과밀도시에서 ‘원치 않는 접촉(Involuntary contact)’ 속에 생애 대부분을 보내다 보면 누구든 살기 위해서라도 과도한 접촉을 차단하는 방향으로 진화할 수밖에 없다는 게 나의 변명이다.
더군다나 인간은, 특히 현대인은 땅에 뿌리박고 사는 식물이 아니다. 고향을 떠나 객지에서 사는 삶을 ‘역마살’이라는 이름으로, 땅이 꺼져라 걱정하던 시대는 지났다. 관심사와 취향, 가치관이 통하는 사람끼리 실시간으로 소통하는 시대에서 우리는 산다. 그런데도 지리적으로 가깝다는 이유만으로 누군가와 친하게 지내라고? 나는 어불성설이라고 생각했다. 행정가나 위정자들이 자기네 관리 부담을 덜려고 끊임없이 그런 류의 캠페인을 모색할 뿐이라고 일축했다.
서울의 동쪽 끝에서 서쪽 끝으로 이사한 지 어느새 1년이다. ‘익명성’이라는 현대인의 보호색을 의지처로 삼는 인생은, 사실 어디로 이사한들 생활이 크게 달라질 게 없다. ‘굴러온 돌’로서 예의는 차려야지 싶어 이사 떡을 돌려보려고도 했지만, 받는 사람의 얼굴빛에 반가움보다는 당황스러움이 앞서 억지 춘향이 노릇도 금세 관뒀다. 그저 밤늦게 세탁기를 돌리지 않는 것이나 베란다에서 담배 피우지 않는 것, 엘리베이터 안에서 마주칠 때 나누는 눈인사로 이웃 간의 정리를 갈음했다. 앞으로도 이 동네에서 겉도는 듯 살아가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며, 그 생각에 만족했다.
그런데 최근에 어떤 사소한 경험이 나를 흔들어놓았다. 주말 저녁, 주민센터 입구 무인발급기 앞에 서 있을 때였다. 손끝을 몇 번씩 갖다 대도 지문 인식이 당최 먹히지 않았다. 포기하고 돌아서려는데 갑자기 한 아주머니가 등장했다. “손가락에 호, 입김을 불어요. 그럼 잘돼요.” 그러면서 내가 그 말도 못 알아먹을 것 같았는지, 자기 손에 입김 부는 시늉까지 하는 것이다. 길 건너에서 내가 하는 꼴을 보고 일부러 횡단보도를 건너온 모양이다. 할 말만 빨리 하고 어찌나 ‘쿨’하게 사라지시는지, 감사하다는 인사도 뒤통수에 대고 간신히 했다.
사실 어느 동네에서나 생길 법한 일이다. 기억이 안 나서 그렇지, 과거에도 이런 적이 있었다고 해도 이상할 게 없다. 하지만 뒤늦게 철이 나는 걸까. 어둑어둑한 골목으로 사라지는 아주머니의 뒷모습을 바라보는데, 순간 따뜻한 바닷물이 찰랑이며 가슴속으로 들어왔다. 되바라진 마음이 착 가라앉으면서, 성현의 말씀이 그제야 귀에 들어오는 듯도 했다. 맞다. 위대한 성현들께서 고작 유불리(有不利)를 따져 이웃끼리 친하게 지내라고 했으랴. 사람이 살아가는 도리가 사랑이니, 마주치는 모든 것들과 정을 나누라는 뜻이었겠지. 이웃이라고 거기에 예외가 될 수는 없다.
우리는 마을 공동체 문화니 열린사회니 하는 개념을 나와는 상관없는, 뭔가 크고 높은 차원에서 나서줘야 하는 일로 생각하곤 한다. 하지만 어두워져가는 저녁, 무인발급기 앞에서 나는 새삼 깨달았다. 당연하게도 우리 개개인이 그 열쇠를 쥐고 있다는 걸 말이다. 우리 한 사람이 그 시작이고, 어쩌면 한 사람으로도 충분하다. 정말 철이 들려고 그러는 걸까. 나는 문득 용기를 내고 싶어졌다. 한 사람의 가능성과 무게감을 가지고, 내 삶을 진득이 바라보고 싶어졌다.
구승준 | 번역가·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