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이 얼마 남지 않았다. 둥근 달처럼 따스하고 모나지 않은 시간이 되면 좋으련만, 여전히 많은 가정이 ‘명절 스트레스’를 호소한다. 그 원흉으로는 ‘명절 음식 만들기’, 특히 ‘차례상 차리기’가 거론된다. 차례를 포함한 제사상 차림의 규칙은 조율이시(제사상에 놓는 과일의 기본 네 가지로 대추, 밤, 배, 감), 홍동백서(붉은 과일은 동쪽, 흰빛은 서쪽), 어동육서(물고기는 동쪽, 육고기는 서쪽), 좌포우혜(말린 고기는 왼쪽, 식혜는 오른쪽) 등 복잡다단하다. 이를 매번 치러내는 것 역시 보통 일이 아니다. 제사상에 오르는 재료가 명절이 되면 물가가 오르기도 하거니와 각 재료를 예법에 맞게 손질해 자리를 지키는 것도 고단한 일이다. 봉화의 한 문중에서는 제사상에 오를 시루떡을 제대로 찌기 위해 종부가 떡을 찔 때는 화장실도 가지 않고, 맑은 물을 떠다 놓고 빌며 불을 조절한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그렇다면 이런 예법은 어떻게 이어져 내려온 것일까.
▶ 격식과 품위가 담긴 현대의 제사상 ⓒC영상미디어
▶ 서울 종로구 통의동 아름지기 전시관 내부의 모습 ⓒC영상미디어
사실 이런 규칙은 유교의 전통 예법서에는 나오지 않는다. 오히려 율곡 이이 선생은 <격몽요결>에서 “제사상 차리는 데 어떤 법칙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시대에 따라 다르고, 가정의 형편에 따라 달라야 한다”고 썼다. 실제로 명절 때면 도움말을 구하는 성균관의 논조도 동일하다. “차례상에는 서너 가지만 올려도 충분하다”는 조언이다. 제수의 항목은 정해진 바 없으며 현재 이어져 내려오는 규칙들도 근원을 알기 어려운 항목이 많다. 박광영 성균관 의례부장은 “우리 예법에 제사는 남녀가, 종부와 종손이 같이 하는 일이었다. 남녀는 하는 일에 구별이 있을 뿐, 일하는 것이 차별이 있어서는 안 된다”라고 말했다.
“기름에 튀긴 과자와 같이 사치스러운 제물은 사용하지 말라(물용유밀과勿用油蜜果).”
퇴계 이황 선생의 생전 유언이다. 이 때문에 퇴계 이황의 종가 불천위 제사상에는 유과나 정과 등 한과류가 올라가지 않는다. 간소하고 정갈한 모습이다. 불천위 제사란, 나라에 큰 공훈이 있거나 도덕성, 학문이 높은 이들은 신주를 땅에 묻지 않고 사당에 영구히 두면서 제사를 지내는 것을 뜻한다. 퇴계 이황 선생은 “홀로 있을 때 행동과 마음가짐을 삼가고, 분노와 사욕을 다스려 평상심을 유지해야 한다”는 말을 좌우명으로 삼고 살았다고 하는데, 그의 마음가짐은 그의 사후, 선생을 기리는 방식에도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심지어 그의 제사상에는 물고기는 동쪽이나 서쪽이 아니라 가운데 자리 잡고 있다. 퇴계의 손부인 권 씨가 “대구포를 가장자리에 놓으니 치맛자락에 자꾸 걸리더라”며 가운데로 옮긴 것이 그대로 이어져 내려왔다.
재단법인 아름지기에서는 기획전시로 통의동 아름지기 사옥에서 ‘가가례(家家禮)’를 진행하고 있다. 이른바 ‘집집마다 다른 제례의 풍경-종가에서 아파트까지’다. 한 층 한 층 오를 때마다 시간은 전통에서 현재로, 과거에서 미래로 이어진다. 시간의 생기를 잃은 제사는 껍데기만 남은 허례허식이 되기 쉽다. 조상을 기리는 마음이 동일하다면, 그 마음을 담은 제사상을 차려보자는 제안이다. 명재 윤증은 소론의 영수로 평생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초야에서 후진을 양성했다. 명재 선생 역시 힘든 형편에 제물을 마련할 후손을 위해 “제사는 엄정하되 간소하게 하라. 제사상에 떡을 올려 낭비하지 말고, 손이 많이 가는 화려한 유밀과와 기름이 들어가는 전도 올리지 말라”고 일렀다. 때문에 그의 상에는 기름기 없는 음식만 있다. 대추와 밤, 감이 한자리에, 삼색나물이 한 접시에 있다. 삼색나물은 뿌리와 줄기, 잎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는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의미하는 것”이라는 게 아름지기 후원문화팀 신혜선 선임의 설명이다.
엄정하되, 간소하라
▶ 1 1인 제사상
2 분리와 조립이 가능한 제기
3 설거지와 보관이 편한 제기
4 휴대가 가능한 노마드 제사상 ⓒC영상미디어
▶ 5 퇴계 이황 종가 불천위 제사상
6 전시관 입구
7 고인에 대한 추모의 마음을 담은 제기 ⓒC영상미디어
전시장의 2층과 3층으로 올라가면, 제사상을 현대 방식으로 재해석한 상차림이 눈에 띈다. 여기에는 전통문화연구소 온지음 맛공방, 테이블 디자이너 박종선, 도예가 이강효, 공예가 심현석 등이 참여했다. 이들은 “격식과 품위가 담긴 우리 제사상을 시대에 맞게 재창조하고 제사에 참여한 식구들이 즐겁게 대화하면서 먹고 나눌 수 있는 소통과 나눔의 상이 되길 바란다”고 했다.
작가들 역시 저마다의 추모의 마음을 담았다. 아름지기의 전시는 기존의 작품이 아니라, 기획에 따라 프로젝트형으로 만들어진다. 허상욱 작가는 돌아가신 장모님을 생각하며 작품을 만들었다. 생전 장모님이 좋아하던 동백꽃 모양으로 제기를 장식해 그리움과 추모의 마음을 표현했다. 이인진 작가 역시 돌아가신 어머님을 생각하며 제기를 만들었다. 어머님을 향한 애틋한 마음과 언젠간 다시 만나리라는 설렘을 분청 제기에 담았다.
제기뿐 아니라 상차림도 달라졌다. 명절이 되면 타지로 떠나는 이들도 많다. 이들은 조상에게 송구한 마음을 안고 간다. 이들을 위해 ‘노마드 제사상’도 선보인다. 휴대용 제사상인 셈인데 가방을 열면 각 제기의 크기에 맞게 고안된 틀에 제기와 젓가락, 술잔 등이 놓인다. ‘1인 제사상’도 있다. 김현성 작가는 “권위적인 제사와 전통의 무게를 잠시 내려놓고, 떠나간 사람을 향한 그리움에 오롯이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 되길 바란다”고 했다. 분주하고 딱딱한 시간이 아니라 소박하지만 경건한 시간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신혜선 선임은 전시 말미에 테이블과 음식을 형상화한 스티커를 건넸다. 만약 상을 차린다면 무슨 음식을 올리고 싶으냐고 물었다. 전시를 보고 나면 그리운 이들의 얼굴이 떠오른다. 그들을 기억하며 그리움의 상을 차린다면 어떤 음식이 올라갈까. 그 음식을 상상하는 동안 고인과의 추억도 함께 뭉게뭉게 떠오른다.
“만약 고인이 피자를 좋아하셨다면 피자를, 아보카도를 좋아했다면 아보카도를 올릴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중요한 건 그를 그리워하는 후손의 마음이니까요.”
집집마다 다른 제례의 풍경종가에서 아파트까지
아름지기 기획전시 ‘가가례(家家禮)’
기간 2018년 9월 8일~11월 2일(월요일 휴관) 시간 오전 10시~오후 5시
장소 서울 종로구 효자로 17 아름지기 전시관 요금 무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