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노라면 출구 없는 괴로움에 빠지는 시기가 있다. 입시, 고시, 취업, 승진 등 시험을 통과하지 못해 탈락자로 생의 주변을 서성이거나 결혼과 출산, 육아를 지나며 완전히 다른 존재로 살게 된 자신을 낯설게 바라볼 때다. ‘삶에 대한 물음표가 감당할 수 없이 커졌을 때’ 구원은 뜻밖에 가까이에 있었다. 책장에 꽂아둔 책을 무심히 집어 들었던 어느 날, 이들의 삶은 다른 궤도를 그리기 시작했다.
ⓒ김범준
하루의 시작과 끝을 책과 함께
김범준
서른 살 그는 고시 5수생이었다. 늦깎이로 기업에 입사했지만 좀처럼 마음을 잡지 못했다. 그의 인생 곡선은 좀처럼 고시 실패 이전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그때는 괜찮다고 얼버무렸지만, 많은 사람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으며 100% 자신감으로 도전한 일이 실패한 충격’은 꽤 오래 그의 발목을 잡았다. 그럼에도 견뎠다. 지켜야 할 가정이 있고, 남겨진 미래는 길었다. 조직의 생리에 적응하려 애썼다. 30대 후반, 후배가 자신의 팀장이 됐다. 동기들에게 뒤처지는 건 그럭저럭 참았는데 더는 버티기 힘들었다. 처음으로 항의했다. 회사에서는 그가 “말을 잘 못해” 승진에서 탈락했다고 했다. 일상의 말이 아니라 조직에서 소통할 리더의 언어를 갖지 못했다는 지적이었다. 그는 스스로 납득하기 위해 책을 찾아 읽기 시작했다. 소통, 리더십, 말, 언어에 대한 책들이었다. 30권을 읽자 머릿속 잡음이 사라지고 눈치 보지 않는 힘이 생겼다. 100권을 읽자 일과 관계에 자신감이 붙었다. 365권을 읽자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1000권을 읽었을 때 그의 첫 책이 나왔다. <회사어로 말하라>, 그의 가장 약한 지점이 가장 강한 동기부여가 됐다.
“그전의 제가 책을 읽지 않던 사람은 아니었어요. 학창 시절에도 ‘독서반’을 했고요. 스무 살부터 마흔까지도 제법 많은 책을 읽었어요. 하지만 책의 종류가 잡다했죠. 문학도 읽었다가, 여행서적도 읽고, 과학책도 읽고요. 그야말로 두서없이 책을 읽었습니다. 제가 달라진 건 ‘전략적으로’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부터였죠.”
그에게 실패의 쓴맛을 보게 했던 고시 공부는 독서에 큰 보탬이 됐다. 그는 한 분야의 책을 고시 준비하듯 읽었다. 먼저 기본이 될 만한 개념서를 읽고 비슷한 분야의 다른 책을 이어 붙였다. 이른바 ‘단권화 독서’다. 그가 오리고 붙여 만든 한 권의 책에는 다양한 관점이 실린다.
“말과 소통에 대한 이해를 하고 나자 쓸 이야기가 정말 많았어요. 사실 제가 쓴 책은 저의 ‘반성의 과정’이 담겨 있어요. 전문가들이 쓴 책을 보면서 나의 부족함을 깨닫게 되고 다시 그런 실수를 반복하지 말자고 다짐하는 과정이죠.”
이후 그는 <저도 눈치 없는 사람과 대화는 어렵습니다만>, <모든 관계는 말투에서 시작된다> 등의 책을 펴냈다. 여러 기업에서 같은 주제로 강연을 요청해왔다. 그와 비슷한 고민을 하던 이들에게는 뜻깊은 강의였다.
“제가 안타까운 건, 정말 들어야 할 분들이 아니라 어느 정도 소통에 대한 감수성이 있는 분들이 강연에 온다는 겁니다. 조직생활을 하다 보면 위로 올라갈수록 소통하는 법을 배우는 게 쉽지 않아요. 자신이 살아온 문화에 젖어 있기 때문에 소통법이 잘못됐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하죠.
매일 책 읽기 가능한 이유
이 소통의 힘에 대한 고민은 가족 안으로도 옮겨갔다. 그에게는 16세, 13세, 11세의 아이들이 있다. 그전에 김범준 작가는 주말이면 ‘잠만 자고’, 자주 ‘짜증을 내는’ 아빠였다고 한다. 소통에 대해 고민하고 독서하고 공부하는 과정은 일상의 소통 감수성도 일깨웠다. 심지어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도 ‘제대로 소통하지 못한 가족의 비극’으로 읽혔다. 이런 고민의 결과는 <내 아이를 바꾸는 아빠의 말>이라는 책으로 출간됐다.
“지금도 아이들과 소통의 전문가라고 말하긴 어렵지만, 적어도 아이들과 이야기할 때 ‘조심하는 법’은 배운 것 같아요. 전에는 생각나는 대로 말했다면, 지금은 아이들의 표정을 살피고 마음을 헤아리려고 노력하죠.”
그의 독서습관은 하루의 시작과 끝을 함께한다. 출퇴근길 그의 손에는 스마트폰 대신 책이 들려 있다. 가끔 책만을 읽기 위해 청춘열차에 오르기도 하고, 공항철도를 타고 인천에 다녀오기도 한다. 그 소란한 승강장 안에서 그가 밑줄 그은 문장들은 오래오래 그를 다잡아주었다.
“일찍 퇴근하는 날이면 근처 카페에 갑니다. 아메리카노 한 잔을 시켜두고 책 읽는 시간을 저는 ‘아메리카노 독서’라고 부르는데요. 한곳에 있는 게 집중에 방해가 되면 또 다른 카페로 옮겨가기도 합니다.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 나를 위해 차 한 잔을 사는 거죠.”
독서모임도 계속하고 있다. 평소 그라면 읽지 않았을 책을, 모임을 통해 알게 되고 배운다. 또 한 번 새로운 세계가 열리는 기분이다. 여전히 그는 직장인이지만, 이제 그는 작가이자 강연가이며 대학원생이기도 하다. 이 모든 게 가능했던 이유를 그는 오직 ‘독서’라고 말한다.
“책 읽기가 어렵다면, 또는 책 읽는 시간을 만들기가 어렵다면 먼저 한 권의 책을 쓴다고 생각해보세요. 만약 내가 원고를 쓴다면 어떤 책을 쓰게 될까, 라고 생각하다 보면 자신이 가장 관심 있는 부분과 부족한 부분이 보입니다. 그럼 그 부분부터 책을 읽어나가면 됩니다.”
김범준 작가가 꼽은 내 인생의 책 BEST 5
인디라이터 명로진
이 책을 읽고 또 이분의 강좌를 듣기 시작하면서 책 쓰기를 생각하게 됐습니다. 벌써 10년 전이네요. 정말 우연히 광화문 교보문고에서 집어든 책이었는데, 제게는 퍽 고마운 책입니다.
서른과 마흔 사이, 어떻게 일할 것인가 : 마음 읽어주는 CEO 김준희의 재도약을 앞둔 직장인을 위한 조언 김준희
저자 강연회를 듣고 조직생활에서 어떤 마인드로 버텨야(?) 하는지를 알게 됐습니다. 책 역시 솔직하면서도 냉정한, 따듯한 형님이 조언해주는 듯한 느낌으로 써 있어서 좋았습니다.
사람이 즐거워지는 1만명 인맥 김승용
아마 이때가 조직생활에서 가장 힘들었던 시기였던 것 같습니다. 조직에서 나의 길이 잘 보이지 않을 때였습니다. 그때 나의 부족함이 인맥이라 생각했고, 이 책을 서점에서 집어든 후 이를 기본으로 ‘단권화’하면서 열심히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다시 태어난다 해도 이 길을 : 사법시험·고등고시 합격수기 모음집 고시연구사 편집부 편
고등학교 1학년 때 이 책을 제 돈 내고 스스로 (동네)서점에서 샀을 겁니다. 이 책을 읽고 변호사, 관료 등의 꿈을 키웠는데. 대학교 때 고시공부도 했고 물론 합격에는 이르지 못했지만 나름대로 치열하게 대학교 3, 4학년을 보냈으니 후회는 없습니다.
오뒷세이아-원전으로 읽는 순수 고전 세계 호메로스
자기계발서를 쓰는 사람이니만큼 주로 자기계발서를 소개했는데 저는 <오뒷세이아>를 자기계발서처럼 읽었습니다. 치열한 경쟁과 전쟁 속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오뒷세이아가 일터에서 하루하루를 경쟁하며 노력하다 이제는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 저의 몇 년 후를 말해주는 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론 이 책을 텍스트로 중년남성을 위한 강좌(예를 들어, 제2의 삶을 살아가는 법)를 하나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해보곤 합니다.
ⓒC영상미디어
우아한 삶으로의 귀환
김슬기
요의가 있을 때 화장실을 가거나 졸리면 잠을 자는 당연한 욕구조차 보장받지 못하는 일상, 밥을 한 끼 먹거나 머리를 감는 일도 여간해서는 기회를 잡기 어려운 생활이 이어졌다. 작가는 이 시기를 “경제적 독립을 가능하게 하는 직업을 잃고, 평정심을 유지하게 하는 고요한 정신을 잃고, 당당함을 만들어주는 자존감을, 사람들과의 유대를, 단잠의 행복을, 평화를, 인내를, 내일에 대한 기대를, 살아야 하는 이유를 모두 잃었던 시간”이었다고 썼다. 하지만 작은 아이의 엄마가 되었기에 붙잡게 된 간절한 문장들이 있었다. 아이에 대한 사랑과 분노가 뒤덮인 삶, 모정과 우울이 뒤섞인 마음을 정돈해주는 정갈한 말들이었다.
“출산과 육아를 겪으며 ‘나’라는 사람에 대한 평가가 가장 많이 달라졌어요. 아이를 낳아 키우기 전까지 저는 제가 꽤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엄마가 되고 보니 인간이라 불릴 자격조차 없이 느껴졌어요. 아이보다 더 크게 울거나 소리를 치는 내 모습을 마주할 때마다 나를 향한 실망과 절망이 몰아쳤거든요. 책은 그런 제 모습이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를 논리적으로 설명해줬어요. 세계적으로 유명한 심리학자가 ‘당신이 그러는 이유는 수면 부족 때문입니다. 잠이 부족하면 누구라도 그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어요’ 말하니 나를 향한 비난을 멈출 수 있게 되더라고요.”
좋은 대학과 직업, 좋은 엄마라는 고개의 끝에는 견딜 수 없는 허무와 번뇌가 존재했다. 그 허무와 번뇌를 잊은 건 독서공동체를 만나면서부터였다. 비슷한 고민을 하는 또래를 만났다. 처음 참석한 모임은 30~40대 주부를 위한 ‘책과 나 돌봄: 나를 위한 치유의 시간’이었다.
“아이가 어릴 땐 외출이 자유롭지 못하다 보니 책을 읽고 후기를 남기는 블로그가 세상과 연결된 유일한 끈이었어요. 외딴 곳에서 아기를 키우는 엄마들은 하루 종일 사람과 대화 한마디 나누지 못하는 경우가 흔한데, 그때 온라인으로 서로의 경험을 나누고 소통하는 게 정말 큰 힘이 돼요. 온라인 공동체가 시공간을 초월해 넓게, 길게 연결해준다면 오프라인 공동체는 훨씬 더 깊고 쫀쫀한 위로와 인연을 선물해주었어요.”
책 읽는 엄마, 책 읽는 아내
김슬기 작가는 책을 읽으면서 비로소 ‘누군가의 무엇’이 아닌 자신으로 숨 쉬고 생각할 순간을 찾았다.
“책을 읽고 나를 돌아보면서 많이 편안해지고 여유로워졌어요. 어제는 아이가 놀다 말고 갑자기 저를 보더니 ‘요즘은 엄마가 화를 안 내서 정말 좋다’ 그러더라고요. 제 마음에 여유가 없고 괴로울 땐 아이의 작은 짜증에도 과민하게 반응하고 수시로 화를 냈는데, 요즘은 큰 소리를 내는 게 한 달에 한 번 있을까 말까, 저도 아이도 한결 편안해졌죠.”
아이를 낳고 키우면서 스스로를 괴롭게 했던 감정이 ‘수치심’임을 알게 됐다. 행동에 대한 반성이 아닌 존재를 부정하게 하는 함정, 수치심을 알게 된 후, 그는 회복탄력성을 갖게 됐다. 심리학으로 시작한 책은 다방면으로 뻗어나갔다.
“책은 아주 다양한 경로를 통해 접하고 선택해요. 독서모임을 하다 보니 함께 모임을 하는 선생님들이 선정한 책을 선택당하기도 하는데 저는 이렇게 강제로 읽게 되는 상황이 감사하더라고요. 내가 몰랐던, 선택할 일이 없었던 책을 읽게 되니까요. 제가 골라 읽는 목록은 언제나 비슷하게 취향이 반영될 수밖에 없는데 책 모임을 통해 더 다양한 분야의 책을 고루 읽을 수 있게 되었어요.”
처음에는 그가 살고 있는 서울 노원구의 작은 카페에서 모였다. 그러다 노원문고에서 독서동아리 지원 사업으로, 지역 독서동아리로 등록 하면 따로 주문이나 이용요금을 내지 않고도 무료로 북카페를 이용할 수 있게 해준다는 걸 알게 됐다. 육아 중인 엄마들은 매주 커피 한 잔 사 마시는 돈도 부담스러울 때가 있는데 반가운 소식이었다. 지금도 일주일에 두 번 이곳을 찾는다. 월요일에는 그림책 모임을, 수요일에는 글책 모임을 하고 있다.
“독서를 시작한 뒤 삶에 기대와 설렘이 생겼어요. 독서를 시작하기 전에는 하루하루가 그저 똑같은 날들의 연속과 반복. 다람쥐 쳇바퀴 돌 듯 일주일, 한 달이 뱅글뱅글 돌기만 하는 느낌이었어요. 지금도 일상은 비슷하게 반복되지만 그 안에 두근두근 떨리는 기대와 설렘이 있다는 게 가장 달라진 점이랄까. 어떤 책이 언제 어떻게 다가올지 모르거든요.
책을 읽고 난 뒤 그는 ‘완벽한 엄마’, ‘슈퍼워킹맘’의 판타지를 내려놓게 됐다. 매일 한 시간씩 투자하던 청소를 그만두게 만든 것도, 하루 최소 30분 땀 흘리며 운동을 하게 만든 것도 책이었다. 덕분에 신랑에게 자유시간을 선물하게 된 것도 책이었고, 그래서인지 김슬기 작가보다도 남편이 그가 책을 읽는 걸 더 좋아한다고 한다.
“더 이상 산후우울증의 덫에 빠지는 엄마가 없었으면 해요. 책이 낯설게 느껴지는 분들은 부담 없이 가볍게, 만만하게 시작하라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한 가지 팁을 더하자면 함께 책을 읽고 수다를 나눌 동료를 만들라는 것?! 자연스레 생기는 건강한 강제성이 독서를 지속하게 하는 힘이 되어주고요, 즐거움의 크기도 배로 키워준답니다.”
김슬기 작가가 꼽은 내 인생의 책 BEST 5
앵무새 죽이기 하퍼 리
10대에 가장 강렬하게 만난 책으로, 이 책을 읽고 난 뒤 정말 진지하게 변호사가 되어야겠다고 다짐하면서, 이글이글 세상에 대한 분노와 열정, 정의에 대한 갈증, 이런 걸 품었던 기억이 나요. 실제로 법대에 진학하진 않았지만, 아직도 이 책을 읽으며 느꼈던 뜨거움이 생각나서 꼽아보고요.
이토록 아름다운 세 살 아멜리 노통브
대학 시절 사랑했던 책이에요. 문학의 가치와 매력에 흠뻑 빠지게 된 계기가 되어주었고요.
비폭력 대화 마셸 로젠버그
저에게 큰 전환점이 되어준 책입니다. 이 책을 읽고 난 뒤 사람들을 대하는 자세가 완전히 달라졌거든요.
코스모스 칼 세이건
이 책은 세상을 바라보는 눈 자체를 바꿔주었다고 할까, 새로운 눈을 달아주었다고 할까. 저에게 완전히 새로운 세상을 선물해준 책입니다.
현대 물리학과 동양사상 프리초프 카프라
본문의 70%는 이해를 못 하고 읽었음에도 눈이 튀어나올 것 같은 전율을 선사한 책이에요. 이 책을 읽고 난 뒤 앞으로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 삶의 가치관과 방향을 선명하게 설정하게 되었답니다.
유슬기 위클리 공감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