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약회사에 다니는 최 모(31) 씨는 추석연휴를 앞두고 시력 교정 수술을 받는다. 지난겨울 휴가 때도 기회가 있었지만 일부러 이날로 수술을 잡았다. 명절 때마다 마주쳐야 하는 친척을 피하기 위해서다. 수술 후 눈을 가리고 안정을 취해야 한다는 핑계로 아예 고향에 내려가지 않을 생각이다. 최 씨는 “지난 설 때 ‘그런 작은 회사 다녀서 어디 장가나 들겠느냐’, ‘언제 대기업으로 옮길 거냐’고 묻는 친척들 때문에 마음 고생을 했다”며 “다음 명절 때도 어떻게든 핑계를 대고 친척 집에는 발길을 하지 않을 생각”이라고 했다.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김 모(29) 씨도 추석 명절이 곤혹스럽기는 마찬가지다. 그는 추석 기간 중 오전 10시에 집을 나와 오후 9시가 넘어서야 귀가할 계획이다. 집에 있으면 “무슨 시험을 보냐”, “올해는 붙을 것 같으냐”는 친척들의 질문을 받을 게 뻔해 자리를 피하는 것이다. 김 씨는 “명절날 카페에서 보내자니 기분이 우울했는데, 지난 설날에도 뜻밖에 카페 1·2층이 공부하는 사람들로 꽉 차 있어 정신이 번쩍 들었던 기억이 난다”고 말했다.
명절 피해 탈출 ‘버그아웃족’
떨어져 있던 가족들이 반갑게 얼굴을 마주할 수 있는 명절에 오히려 가족들을 피하는 젊은이들이 늘고 있다. 선물 준비와 집안일, 웃어른의 참견과 훈계에서 오는 ‘명절 스트레스’ 를 피해 도망치는 일명 ‘명절 버그아웃족’이다. 버그아웃(Bugout)은 전쟁이나 재난 상황에서 일시적으로 탈출하는 것을 말한다.
지난 2월 8일 아르바이트포털 알바몬이 성인 남녀 1959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명절 스트레스’ 설문조사를 살펴보면, 66.3%가 설을 앞두고 명절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특히 대학생·취업준비생들은 ‘취업에 대한 친척들의 잔소리’(45.2%)를 가장 큰 스트레스 요인으로 꼽았다.
취업과 관련된 잔소리 중 ‘누구네 자녀는 어떤 회사 다닌다 하더라’(31.2%), ‘다 너 잘되라고 하는 얘기다’(26.7%)를 가장 견디기 힘들다는 반응을 보였다. 안타까움을 건네지만, 취준생은 이해받지 못해 공허하다. ‘명절대피소’가 나오는 건 자연스러운 귀결이다.
▶ 설 연휴를 하루 앞둔 지난 2월 14일 서울 광진구 화양동 건국대학교 상허기념도서관에서 학생들이 공부에 전념하고 있다. ⓒ연합
이런 분위기를 보여주듯 학원가엔 ‘추석 특강’이 줄을 잇는다. 파고다어학원은 2015년 추석부터 연휴 기간마다 학습 공간과 간식 패키지, 인터넷 강의(이하 인강) 프리패스를 제공하는 명절대피소를 개설하고 있다. 인강 연휴 프리패스는 취업과 승진에 필요한 토익, 토익스피킹, 오픽, HSK 과목을 연휴 기간 동안 무제한 수강할 수 있는 상품이다.
파고다어학원은 평창동계올림픽 기간인 2월 15~18일까지 사흘간 ‘파고다 명절대피소’를 운영해 버그아웃족들의 사랑을 받았다. 명절대피소 방문객에게 학습 공간을 비롯해 샘표 질러 크리스피 연어와 스낵 등의 간식 패키지와 인강 연휴 한정 프리패스를 제공했다. 파고다어학원 관계자는 “따뜻한 학습 공간과 함께 간식과 어학 학습 체험 기회를 제공해 취준생과 대학생 등 젊은 층 사이에서 명절 연휴 기간 안식처로 많은 사랑을 받았다”고 밝혔다.
각종 취업 정보 사이트에도 추석 연휴 기간 함께 공부할 ‘단기(短期) 스터디’ 모집 글이 줄을 이었다. 한 취업준비생은 커뮤니티에 “집에서 눈칫밥 먹지 말고 차라리 영어 면접을 대비하자”는 ‘추석 스터디’ 회원 모집 글을 올렸다. 취업준비생 커뮤니티에는 명절을 이용해 취업에 성공한 친척을 만나 취업 조언을 받았다는 후기도 심심찮게 올라왔다.
네이버 취업 및 공기업 준비 사이트 ‘스펙업’, 공준모(공기업을 준비하는 사람들의 모임)에는 추석 연휴 기간 번개 스터디를 모집하는 글이 수두룩하다. 공무원 준비생 박 모(30) 씨는 “시험이 바로 다음 달에 있어 연휴에만 함께하는 스팟스터디를 구했다”며 “가족들 눈치 보지 않고 부족한 토익스피킹을 집중적으로 보완하고 싶다”고 말했다.
여행을 떠나는 사람도 적잖다. 서울에서 직장을 다니는 이 모(33) 씨는 추석 연휴를 맞아 고향 가는 기차표 대신 친구들과 함께 일본 홋카이도 항공권을 끊었다. 며칠 전 “이번 추석 명절에는 남자 친구를 집에 데려올 거냐”는 어머니 전화를 받고서 마음을 바꿨다. 이 씨는 “고향 집을 갈 때마다 결혼 문제를 걱정하는 부모님의 잔소리에 지쳤다”고 했다. 이런 ‘도피성’ 해외여행객까지 더해져 이번 추석 연휴 동안 해외 출국자 수는 늘어날 전망이다.
<트렌드 코리아 2018>이 소개하는 케렌시아 이야기
서울대 소비트렌드분석센터가 출간한 <트렌드 코리아 2018>은 명절 기간 동안 질문 공세와 잔소리 폭격에 시달리는 청년들에게 ‘명절대피소’를 설명한다. <트렌드 코리아 2018>은 나만의 ‘케렌시아’로 탈출을 권한다. 케렌시아(Querencia)는 투우장의 소가 마지막 일전을 앞두고 홀로 잠시 숨을 고르는 자기만의 공간을 의미한다.
인생이라는 매일매일의 전투에서 지쳐가는 현대인들에게 안식처로서 케렌시아의 공간이 절실하다는 것이다. 간단하게 ‘패스트 힐링’을 하고, 자기만의 아지트를 꾸미며, 집이나 직장이 아닌 제3의 공간을 찾아 힐링의 시간을 마련하기도 한다. 또 온라인에 연결되지 않을 권리를 추구한다.
<트렌드 코리아 2018>에서는 케렌시아의 다양한 형태로 도심 속 패스트힐링(수면카페, 만화카페, 한방카페), 창조적 체험공간으로서의 케렌시아(DIY카페, 소셜 액티비티 플랫폼), 취준생들을 위한 명절대피소(어학원에서 명절 연휴 때 스터디 공간 개방) 등이 있다고 주장한다.
<트렌드 코리아 2018>에 따르면, ‘1코노미 시대(혼자만의 소비생활을 즐기는 사람)’에 나홀로족의 최적의 케렌시아는 다름 아닌 집이다. 신경건축학(Neuroarchitecture)이 강조되는 시대에 집 공간을 푸르른 식물로 꾸미려는 플랜테리어 트렌드가 인기를 끌고 있다. 외부에서 하는 여가 및 사회활동을 집 안으로 옮겨오는 코쿠닝(cocooning)은 물론, 맨케이브(man cave, 주택의 지하, 작업장, 창고 등 남성이 혼자 공구를 사용해 작업할 수 있는 공간)는 남성들에게 심리적 위안과 안정을 주는 자기만의 사적 공간으로 자리 잡고 있다.
이제 케렌시아는 오프라인을 넘어서 온라인 공간까지 확장되고 있다. 사람들은 온라인의 케렌시아에서 ‘익명’이라는 가면을 쓰고 억압당했던 마음을 풀어헤치며 억눌린 감정을 해소하고 있다. 서울대 한 학생이 ‘임금님 귀는 당나기 귀’에서 착안한 익명 게시판 ‘대나무숲(익명 소통앱)’ 등이 그 예다. 직장인은 케렌시아에서 ‘연결되지 않을 권리’를 찾는다. 전화 송수신과 9개 번호만 저장이 가능한 더라이트폰(the light phone)이 덩달아 인기다.
▶ 서울 마포구 합정동에 있는 만화카페 ‘즐거운 작당’ 풍경 ⓒ연합
서울대 소비트렌드분석센터 관계자는 “제3의 공간인 케렌시아에서 사람들은 지친 몸과 마음을 추스르고 다시 전장으로 나갈 준비를 한다”며 “케렌시아는 단순한 수동적인 휴식을 넘어 ‘책맥카페’처럼 신선하고 창의적인 문화콘텐츠로 변신하고 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