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팀다리미는 휘파람으로 베토벤 9번 교향곡을 연주하며 옷을 다리고 빳빳하게 풀까지 먹인다. 커피잔은 방금 내린 커피를 들고 슬금슬금 다가오고, 계란 프라이는 입속으로 돌진할 태세다.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단편소설 '내겐 너무 좋은 세상'의 일부다.
주인공 뤽은 인공지능의 발달로 점점 사람처럼 변해가는 기계들을 참고 받아들이기에 한계를 느낀다. 불만 속에 강제적인 아침식사를 하던 중 금발의 여자 강도가 들이닥쳐 집 안에 있는 가전제품을 다 쓸어간다. 하지만 뤽은 오히려 기분이 좋다. 스스로 온·오프 스위치 누르던 시절을 그리워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카페에서 우연히 그 여자를 만나 사랑을 속삭이려는 순간 여자는 뤽의 몸에 있는 인공심장을 꺼낸다. 뤽 또한 사람이 아니었던 것. 소설 속 뤽도, 여자도 유기체가 아니다. 지구상에 인간이 존재하지 않게 된 것은 이미 오래전, 그러니까 모두가 기계다.

알파고 파고가 엄청나다. 우울하다는 기분 속에 인류의 미래를 위해 뭔가 고민할 때가 됐다는 의견까지 나온다. 할리우드 영화에서 보듯 기계문명이나 인공지능은 때때로 인간의 종말을 암시하기도 한다. 알파고의 등장으로 사람들은 이제 디스토피아적인 인류의 미래가 머지않았다며 일말의 공포까지 느낀다. 2007년 퓰리처상 수상작인 코맥 매카시의 소설 <로드(The Road)> 도 이 같은 주제를 다루고 있다.
<로드> 는 디스토피아의 세계를 상징한다. 배경은 폐허의 지구다. 재앙으로 모든 것이 잿더미다. 멸망한 인간 세상의 미래, 건물은 무너졌고 나무들은 불탔다. 태양은 뜨지 않아 언제나 춥다. 작품은 기계문명으로 멸망한 세계에서 생존을 위해 몸부림치는 아버지와 아들의 고단한 여정을 실감나게 그리고 있다.
소설을 원작으로 한 동명의 영화는 더욱 끔찍하다. 절망과 어둠을 몸서리칠 만큼 두렵게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아버지와 아들은 서로의 체온으로 몸을 덥히며 따뜻한 남쪽, 희망의 근원인 불씨를 찾아 끝없이 걷는다. 아버지는 죽지만 아들은 끔찍한 세월을 견디면서도 꿈을 잃지 않는다. 작품 중 아버지가 말한 불씨는 아들의 마음속에 살아 있는 꿈이었다.
인공지능과 기계문명은 인류가 오랫동안 개발하며 꿈꿔왔던 것이다. 이제 이 같은 인간의 피조물이 오히려 인간을 위협하는 세상이 가능하게 됐다. 그러나 인공지능이 알아야 할 것이 있다. 바로 눈물이다. 인간은 슬프거나 기쁠 때 눈물을 흘린다. 스탠리 큐브릭의 영화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에 등장하는 로봇이 시사하듯 인공지능도 언젠가 감정을 가질 수는 있다. 미래학자들도 감정 로봇의 등장을 단언하고 있다. 그러나 눈물을 흘리는 로봇의 출현은 아직은 먼 훗날 일이다.
영화 '터미네이터2 : 심판의 날' 편을 보자. 미래의 인류를 구원할 지도자를 위해 스카이넷과 싸우던 터미네이터(아놀드 슈왈제네거)는 임무를 완수하자 펄펄 끓는 용광로에 스스로 몸을 던지려 한다. 그 순간 소년의 눈에서 눈물이 쏟아진다. 터미네이터가 묻는다. "존, 눈에서 나오는 그 이상한 액체가 무엇이냐?" 소년이 답한다. 인간은 슬프거나 감동을 느끼면 눈에서 뜨거운 액체가 나온다고. 존이 흘리는 눈물을 보며 터미네이터는 묘한 감동 속에 스스로 몸을 던진다. 인간과 다름없던 터미네이터가 정작 감동받은 것은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에서 터져 나오는 이상한 액체, 즉 눈물이었다.
눈물이라는 단어는 이처럼 인간에게 엄청난 의미를 지니고 있다. 눈물은 인간과 기계를 경계하는 마지막 차별성이 되기도 한다. 문제는 세상이 삭막해지면서 눈물도 점차 말라간다는 사실이다. 이 봄, 감동으로 눈물 흘릴 일이 어디 없을까.
글 · 김동률 (서강대 MOT대학원 교수언론학·매체경영) 2016.03.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