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빠는 공부를 안 했으면 뭘 했을까?” 그날은 딸아이가 특별히 요리한 카레를 먹는 날이었다. “글쎄… 뭘 했을까?” 머릿속에 수많은 순간이 주마등처럼 빠르게 지나갔다. “……. 뭘 했을까?” 두 번째 말했을 땐 대답의 순간은 이미 지나가버렸다. 카레를 먹는 동안 기억 플래시처럼 끝없이 예전 선택의 순간이 툭툭 튀어나왔다 사라져갔다.
삶은 선택이다. 반반의 확률 속에 내가 선택한 쪽이 현실이 되고 나머지 반은 사라진다. 사라진 반은 어디로 가는 것일까?
양자역학의 세계에서 확률은 사라지지 않는다. 결과로 나타나지 않을 뿐 선택하지 않은 확률은 세상과 얼기설기 얽혀 퍼져 있다. 선택되지 않은 가지가 있을 뿐이다. 만약 조건을 바꾸면 다시 나타날 수 있는 잠재적 정보로 남는다. 양자역학을 대표하는 코펜하겐 해석을 빌리자면 선택하지 않은 길은 물리적 의미를 갖지 않으며 그것이 ‘어디로 갔는지’를 묻는 질문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고 본다.
대학 졸업을 앞두고 친구들이 바삐 어디론가 가고 있었다. “기진아 너도 같이 가자!” 친구들은 남대문 근처에 있던 삼성 본사에 취직 원서를 내러 가는 길이었다. 원서를 내는 곳은 복잡했고 다들 바닥에 앉아 지원서를 쓰고 있었다. 나도 그 무리에 섞여 자기소개서, 입사 동기 등 빈칸을 메우고 있었다. 그러다 원서를 버리고 나와버렸다.
당시 여자친구와 헤어진 상태였다. 여자친구는 홀로 프랑스 파리로 유학을 떠난 상태였다. 혼자 남은 난 어느 때보다 불안한 존재였다. 사라진 선택지 중에 남은 것은 공부였다. 물리학은 잘하지 못했지만 하면 잘할 수 있다는 생각은 항상 있었다. 대학원에 진학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도피처일 수 있었지만, 선택이었다. 그때 원서를 낸 친구들은 모두 회사원이 되었다.
30대가 되어 나는 일본 도쿄공업대학 물리학과에서 조수로 일을 했다. 조수는 조교수 정도의 지위였다. 결혼을 했고 두 딸이 있었다. 안정돼 보였지만 불안한 상태였다. 학문적으로는 풀기 어려운 문제를 앞에 놓고 있었고 이국땅에서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하는 존재였다.
정확히 서른다섯 살이었을 때, 공부를 포기하고 포도밭을 일궈 와이너리를 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진지하게 했다. 프랑스 부르고뉴의 포도밭에서 포도 농사부터 시작해 와인 양조까지 차근차근 배워보자는 생각이었다. 와인을 좋아하기도 하고 충분히 잘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레드 와인은 로마네 콩티, 화이트 와인은 몽라셰를 목표로 잡았다. 집사람에게 이야기했지만 “이 사람이 또 꿈을 꾸는구나!” 정도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난 심각했다.
도쿄공업대학에서 한국인으로 생존하는 일은 무척 힘든 일이었다. 학생들을 잘 가르쳐야 했고 수준 높은 논문을 써야 했다. 말 그대로 평균 이상을 해야만 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 당시가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겠다. 아마 더 힘든 일이 생겨서 넘어가지 않았을까?
1957년 미국 프린스턴대학의 대학원생이었던 미국의 물리학자 휴 에버렛 3세는 박사 논문을 통해 훗날 ‘평행우주론’이라고 불리게 될 해석을 발표했다. 그는 양자역학이 자연의 근본적인 이론이라면, 미시 세계뿐만 아니라 우주 전체에도 적용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휴 에버렛 3세에 따르면, 우주는 선택에 따라 연속적이자 결정론적으로 다양한 세계로 갈라져 나간다. 우주의 일부인 우리 역시 예외가 아니다. 어떤 선택이 일어날 때마다 우리는 상태가 서로 다른 여러 ‘나’로 갈라진다. 다만 각각의 ‘나’는 자신이 속한 세계만을 경험할 수 있을 뿐, 다른 세계의 ‘나’는 인식하지 못한다. 이렇게 수없이 가지가 나뉘는 세계 중 하나가 바로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다.
우리는 평행우주를 직접 감지한 적은 없다. 우리가 사는 세상과 평행우주의 세계는 간섭할 확률이 낮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아인슈타인의 특수상대성이론에서 시간 지연이나 공간 수축 효과를 일상에서 직접 체감하지 못하는 것과 비슷하다. 하지만 세상이 좋아져 우리의 관측 능력이나 정밀도가 높아진다면 가능할 수도 있다. 물론 예측이긴 하지만.
아직도 와이너리에 대한 꿈은 사라지지 않았다. 커튼 뒤에서 팔짱을 끼고 다음 막에 출연할 장면을 기다리며 불 켜진 연극 무대를 바라보는 배우의 눈빛처럼, 그 꿈은 매번 와인 코르크를 딸 때마다 빛이 난다.

이기진
서강대학교 물리학과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