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제사 부자 오동세·오정우 실무관 “우와~.” 대전 서구 국가유산청 천연기념물센터 전시실에 들어서자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창공을 나는 듯한 독수리 무리, 떼로 모여 있는 원앙, 바위에서 무리 지어 사는 수달, 코를 씰룩일 것 같은 점박이물범 등 천연기념물 동물 박제 표본이 관람객을 맞는다. 센터가 전시 중인 천연기념물 동물 박제 표본은 총 260여 점. 금방이라도 살아 움직일 것처럼 생생하다.
수백 점에 달하는 전시품은 오직 두 사람의 손끝에서 만들어졌다. 오동세(65) 국립중앙과학관 실무관과 그의 아들 오정우(41) 국가유산청 천연기념물센터 실무관이다. 아버지 오 실무관은 2000년 국내 첫 도입된 국가유산수리기능자(박제 및 표본제작공) 제1호 전문 박제사다. 박제 경력만 올해로 43년 차다. 아들 오 실무관 역시 2016년 같은 자격을 획득했다.
박제 및 표본제작공은 국내 61명에 불과하다. 이 가운데서도 기관 소속으로 현업에서 활동하는 인원은 10여 명 내외다. 인력이 워낙 희소하다 보니 부자가 함께 활동하는 것을 두고 ‘천연기념물’이라는 표현이 나올 정도다. 아들 오 실무관은 박제 및 표본 보존과 관련해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아직 국내에서는 체계적인 학술 연구가 충분히 이뤄지지 않은 분야다.
두 사람이 제작한 표본은 1000점 이상. 대부분 43년의 경력을 자랑하는 아버지의 작품이지만 올해로 14년 차에 접어든 아들의 성장세도 만만치 않다. 아들 오 실무관은 최근 500㎏이 넘는 제주 흑우(검은 소)를 박제 표본으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
천연기념물센터 수장고에서 마주한 표본은 살아있는 소들 틈에 가져다 놓아도 쉽게 구별하기 어려울 만큼 생동감이 넘쳤다. 콧망울에 송골송골 맺힌 땀과 길고 촘촘한 속눈썹, 초롱초롱한 눈동자까지 박제 표본이라 말하지 않으면 살아있는 소로 착각할 정도였다. 꼬박 6개월을 바쳐 완성한 작품이다.
아들이 제작한 흑우 박제 표본을 쓰다듬는 아버지 오 실무관의 눈빛은 대견함으로 가득했다. 하지만 ‘박제’에 대한 좋지 않은 인식 탓에 아버지는 박제사의 길을 걷겠다는 아들의 뜻을 한때 반대했다.
두 사람은 현재는 소속이 다르지만 2017년까지만 해도 천연기념물센터에서 박제 표본을 함께 제작했다. 부자이자 선후배로서 남들이 가지 않는 길을 함께 걷는 두 사람의 이야기가 궁금했다. 지난해 말 천연기념물센터에서 부자를 만났다.
박제 표본 제작 과정이 궁금하다. 아들: 천연기념물 동물 사체가 발견됐다는 신고가 들어오면 이를 수거하는 일부터 시작한다. 수거한 시료는 털을 비롯한 외관을 깨끗이 세척하고 말린다. 그다음은 가장 중요한 손질이다. 조류처럼 형태를 유지하기 위해 일부 뼈를 남기는 경우를 빼면 대부분 가죽 이외 모든 부분을 제거한다. 이때 깨끗하게 조직을 제거하지 않으면 부패된다. 이후 철사로 형태를 잡고 속을 채운 후 마무리한다. 새는 보름 정도, 큰 동물은 한 달 정도 작업 기간이 필요하다.
박제사가 된 계기가 궁금하다. 아버지: 원래 다른 사업을 했다. 1983년 한남대학교 중앙박물관에 들러 박제된 새를 보고 흥미를 느껴 뛰어들었다. 그때도 박제 표본 제작은 학원 다니면서 배우는 게 아니라 도제식으로 기술을 전수받았다. 처음 해본 일이었지만 너무 재미있었다. 나는 빨리 배운 편인데도 2년 정도 걸렸다.
아들도 아버지의 영향을 많이 받았을 것 같다. 아들: 어릴 때 아버지가 매주 ‘동물의 왕국’ 다큐멘터리를 녹화해달라고 했다. 녹화를 하려면 나도 봐야 하지 않나. 처음에는 숙제처럼 했는데 보다 보니까 재미있더라. 초·중학생 때는 아버지와 함께 한겨울 천수만에서 일주일간 새를 관찰하기도 했다.
아버지: 새를 워낙 좋아한다. 1990년대 후반쯤 무인도인 남해 통영 홍도에서 한 달 동안 등대지기가 사는 막사에 기거하면서 새를 연구한 적도 있다. 홍도는 아시아 최대의 괭이갈매기 서식지로 유명하다. 갈매기가 그곳에 알을 많이 낳아서 알섬이라고도 불린다. 첫날 섬에 선착장이 없어 갯바위에 내렸는데 갈매기들이 몰려들어 똥을 싸대는 바람에 똥범벅이 됐다. 날 경계한 거다. 근데 섬에서 며칠 지내다 보니 나중에는 부르면 머리 위로 날아와 구름처럼 덮어주더라. 다정하지 않나? 새 연구하러 수많은 곳을 다녔지만 그때 기억이 가장 선명하게 남아 있다.
왜 아들이 하겠다고 했을 때 반대했나. 아버지: ‘박제’ 하면 ‘불법’이라는 수식어가 붙을 만큼 인식이 안 좋았다. 지금은 그래도 나은데 처음 일을 시작했을 땐 고초를 많이 겪었다. 법에 따라 절차대로 작업해도 여러 기관에서 나와 조사를 했다. 험한 일이라 아들은 다른 길을 가길 바랐다.
아버지 반대를 무릅쓰고 박제사를 고집한 이유는 무엇인가. 배우기 힘들진 않았나. 아들: 어릴 때부터 아버지의 작업을 봐왔지만 크고 나서 보니 또 느낌이 다르더라. 대단한 일을 하시는구나, 우리 사회에 꼭 필요한 일이구나 싶어 관심이 갔다. 배울 땐 힘들었다. 아버지는 숙련자이지만 난 아니지 않나. 다 배우고 나면 단순한 포인트들이 있는데 그걸 손에 익히기까지 오래 걸렸다. 아버지는 작업을 시작하면 끝날 때까지 잠을 안 주무신다. 퇴근 후에도 작업을 시작해서 새벽 3~4시에 끝날 때가 많았다. 옆에서 꾸벅꾸벅 졸았다.
아버지: 박제 표본 제작은 시작하면 끝을 봐야지 다음으로 미루면 안 된다. 그 사이 가죽이 말라버리면 완벽한 작품을 만들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그래도 아들이 잘 따라와줬다. 아직도 완벽하진 않지만. (웃음)
아들: 아버지가 계셔서 든든했다. 아버지는 2007년 센터 개관 때부터 여기에 계시다 2017년 다른 기관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 사이에 5년 정도 함께 일했는데 아버지가 떠나실 때 부담이 컸다. 제작 작업을 오롯이 전담해야 하니까. 책임이 큰 만큼 열심히 했다.
각자 기억에 남는 작품을 한 가지씩 꼽는다면. 아버지: 2000년대 제주 조랑말 박제 표본을 만들었다. 박제의 가치가 많이 알려지지 않은 때라 이 작업을 두고 요즘말로 하면 악플 세례를 받았다. 제주까지 가서 폐사체를 직접 가져와야 했고 시간 여유도 많지 않았다. 우여곡절이 많은 작품이다.
아들: 초여름에 울릉도에 천연기념물 서식지를 조사하러 갔다가 우연히 흑비둘기 폐사체를 수거했다. 조사 내내 폐사체가 부패될까 노심초사했다. 그때까지 흑비둘기 표본이 한 점도 없었던 터라 지켜야 한다는 사명감이 컸다. 다행히 무사히 가지고 올라와 완성했다. 바다에 사는 매 암수 한 쌍도 기억에 남는다. 수컷이 사냥한 먹이를 공중에서 암컷에게 전달하는 해당 종의 습성을 표현한 작품인데 발톱에 쥔 먹이인 바다제비도 진짜 바다제비를 구해 제작했다.
단순한 박제가 아니라 연출을 통해 생태를 알린다는 게 재미있다. 아들: 숙제처럼 느껴지는 부분이기도 하다. 개체가 한 마리만 있으면 연출이 어렵다. 나무에 앉아 있거나 날고 있는 모습, 먹이를 먹으려는 모습 정도일 텐데 여기서 한두 마리만 더 있어도 표현할 수 있는 부분이 많아진다. 수달이나 독수리처럼 무리 생활을 하는 동물들이 특히 그렇다. 전시관에 열다섯 마리의 원앙이 공중에서 바닥으로 내려앉는 모습을 단계적으로 표현한 작품이 있다. 착지하는 모습과 무리 생활을 하는 원앙의 생태를 보여주기 위한 연출인데 사람들이 좋아해주셔서 뿌듯하다. 그럴 때 박제사의 보람을 느낀다.
박제의 가장 큰 가치는? 아들: 박제 표본 제작은 생물학적 연구에서 시작됐다. 생물을 채집하고 해부하고 보존할 방법을 찾은 게 박제 기술이었다. 종의 표본을 보존한다는 학술적 목표는 발전이 많이 이뤄졌고 지금은 사라진 종이나 보기 힘든 종들의 표본을 대상으로 시료를 채취해 유전자 분석을 할 수 있는 단계까지 왔다. 형태학적 연구에 유전학적 활용 가치가 더해진 셈이다.
세대를 이어오며 박제 기술도 변화했을 것 같다. 아버지: 시대가 많이 변했지만 박제 표본 제작 방식은 디지털화가 어렵다. 워낙에 손이 많이 가고 세밀하게 작업해야 하는 부분이 많기 때문이다. 다만 달라진 점이 있다면 속을 채우는 재료다. 초창기엔 지푸라기나 대팻밥을 넣다 보니 벌레가 살기 좋은 여건이라 좀을 먹는 경우가 있었다. 요즘에는 솜으로 속을 채운다.
우리나라 박제 수준은 어느 정도인가. 아들: 우리나라에 박제 문화가 들어온 지 50년 정도밖에 안 됐다. 역사가 길지는 않지만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수준까지 올라왔다고 생각한다. 아버지는 몽골에 기술을 전수하러 가기도 한다.
앞으로의 계획이 궁금하다. 아들: 천연기념물 동물 70여 종을 모두 작업하는 게 목표 가운데 하나다. 그 가운데 60종 내외가 센터에 있다. 없는 종은 종 자체가 희귀하거나 바다가 서식지인 종 등 시료 자체를 구하기가 힘든 경우이다. 또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박제사로서 국내 기술을 세계에 알리는 역할을 하고 싶다.
아버지: 정년이 없는 일이지만 물러나야 할 때 잘 내려오고 싶다. 물론 작업해 보고 싶은 종은 아직도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멸종됐지만 북한에는 있는 크낙새 같은 종들이다.
고유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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