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최초 시각장애아 놀이 교구 개발 박귀선 담심포 대표 “일본에는 시각장애아를 위해 손으로 만든 점자촉각 동화책이 5만 권이나 있는데 우리나라에는 한 권도 없다는 게 충격이었죠.”
천을 활용해 책을 만드는 북아트 작가로 활동하던 박귀선 씨는 20여 년 전 한 공익단체가 인터넷 카페에 올린 글을 보고 눈을 의심했다. 세상에 책이 이렇게 많은데 정작 시각장애아를 위한 그림책은 한 권도 없다는 내용이었다. 두 아이의 엄마이자 시각장애인 할머니를 곁에서 지킨 그의 마음이 움직였다. 그는 점자촉각 교구재를 만들어달라는 공익단체의 호소에 다른 9명의 작가와 함께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당시는 북아트라는 개념조차 생소한 때였다. 더군다나 손으로 읽는 점자로 만들어야 하다 보니 대부분의 작업을 모두 만나서 진행해야 했다. 맹학교 선생님들의 검수와 수정 작업에도 시간이 걸렸다. 지난한 작업 끝에 마지막까지 남은 작가는 그를 포함해 단 3명. 이들은 1년 반 이상을 꼬박 이 책에 매달린 끝에 동화책 ‘아기새’를 완성했다. 겁 많은 아기 새가 용기를 내서 힘차게 하늘로 날아오른다는 내용이었다.
그가 아기 새를 다시 만난 건 그로부터 몇 년 뒤였다. 2013년 아이 하원을 위해 어린이집을 찾았다가 맹학교 선생님인 학부모를 알게 됐다. 그가 ‘아기새’ 작가인 걸 안 학부모는 전국 맹학교에 그 책이 더 필요하다면서 조금 더 만들어줄 수 있느냐고 물었다. 얼마나 힘든 작업인지 알기에 고민했으나 아이들에게 손가락으로 빛을 찾아주는 길을 외면하기 힘들었다. 주변의 공예작가 세 명과 의기투합해 전국 13개 맹학교와 점자도서관 등지에 보낼 총 17권을 2년여에 걸쳐 만들었다. 제작비는 사비와 크라우드 펀딩을 통해 충당했다.
맹학교 선생님들의 열렬한 호응에 박 씨는 본격적으로 이 일에 뛰어들었다. 2025년 현재까지 그가 개발해 맹학교 및 특수학급, 시각장애아 가정 등에 기증한 놀이 교구재는 총 20종, 4만여 개에 달한다. 더 많은 아이에게 혜택을 주기 위해 사회적 기업 ‘담심포(淡深浦)’를 설립하고 기업의 참여를 유도했다.
한글 점자의 날(매년 11월 4일)을 맞아 실과 바늘로 시각장애아의 희망을 잇고 붙여온 그를 11월 초 경기 양주시 작업실에서 만났다. 가장 눈에 띈 건 그가 처음으로 만든 ‘아기새’였다. 때가 타고 이곳저곳이 닳았지만 오감을 자극하는 요소가 많았다. 북슬북슬한 엄마 새의 날개, 아기 새들을 품어준 나무, 떼었다 붙일 수 있는 구름에 딸랑이는 소리까지 얼마나 정성을 들였는지 한눈에 보였다. 한글로 먼저 이야기를 적고 그 위에 투명한 점자 필름을 한 땀 한 땀 붙여놓았다. 개발도 제작도 어느 것 하나 쉽지 않았다는 그의 이야기가 절로 이해가 됐다.
시각장애아를 위해 나선 이유가 뭔가? 할머니가 시각장애인이었다. 어릴 때 모시고 다니면서 ‘눈이 불편하면 못하는 게 너무나 많다’는 걸 간접적으로 경험했다. 비장애아는 볼 게 충분한데도 부모들은 계속 더 새로운 걸 찾지 않나. 시각장애아는 그런 경험을 하지 못한다는 게 너무 안타까웠다.
‘아기새’ 이전에는 점자 동화책에 그림이 없었나? 그림책이라는 개념이 없었다. 나도 처음에는 안 보일거라 생각하고 흑백으로 만들려고 했다. 그런데 실제로는 전맹(全盲)보다 저시력 아이가 더 많다. 소재와 색을 다양하게 넣어 책을 만든 이유다. 우리 교구는 세탁기에 빨아 쓸 수도 있다. 기존의 점자 교구재나 책은 귀하기도 하고 망가질 수도 있어 아이들이 혼자 사용하는 데에 한계가 많았다. 우리 책은 천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안전하고 뭐가 묻어도 괜찮다.
일본에는 시각장애아를 위한 책이 많다고. 맹학교 학부모들이 아이들을 학교에 데려다준 후 대기실에서 기다리면서 수업이 끝날 때까지 교구재를 만들었다고 들었다.
‘아기새’ 이후 새로운 교구재를 개발했다. ‘아기새’를 추가로 보급하니 맹학교 선생님들이 아이들이 집에 가지고 갈 수 있는 책을 만들어주면 좋겠다고 하더라. 한 학교에 한두 권 정도밖에 보내지 못했으니 아이들이 집에 가져가는 건 물론 교실마다 두기도 어려웠다. 맹학교 선생님들이 보조 교구재가 없으니 직접 만들어 쓰기도 했는데 역부족이었던 거다.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무엇이든 만들어만 주면 정말 잘 쓸 수 있다”는 말을 듣고 슬펐다. 그래서 만든 게 ‘혼자서도 잘해요’였다. 단추를 잠그고 지퍼 올리고 신발 끈 묶는 연습을 하는 책이었다. 점자도 아이들이 거부감 없이 받아들일 수 있도록 부드러운 소재로 만들었다. 아이들이 점자를 편안하게 접하면 실제 학습에 들어갈 때 훨씬 친근하게 생각하고 잘 흡수한다고 하더라.
제작 수량이 상당했는데. 아이가 집에 가져가서 볼 수 있게 많이 만들어달라고 해서 200권을 만들었다. 내 블로그에 만드는 법을 적어놓고 봉사자를 모집했다. 전국에 봉사 동아리가 10여 개 만들어졌다. 그들과 함께 작업해 2년 정도 걸렸다. 그래도 아이가 크는 속도를 못 따라가더라. 아이가 배울 시기를 놓치는 걸 보고 ‘사회적 기업을 만들어 대량으로 보급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사회적 기업가 육성 사업에 신청해 교육을 받고 2019년 담심포를 설립했다.
담심포는 어떻게 운영되나? 우리가 개발한 교구재를 만들기 키트로 제작했다. 기업 사회공헌 담당자들이 키트를 구매해 사내 봉사 및 사회공헌 활동 등을 통해 제작한 뒤 다시 우리에게 보내주면 이를 검수해 필요한 곳에 보내는 방식이다. 운 좋게 사회공헌 사업을 운영하는 회사가 많이 참석하는 대회에서 설립 초기 2년 연속 최우수상, 대상을 받아 생각보다 빠르게 자리를 잡았다.
검수작업을 직접 한다고. 불량률이 5% 정도 나온다. 인형을 거꾸로 바느질한다든지 점자가 있어야 할 자리가 아닌 다른 곳에 붙어 있기도 한다. 상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만들어오는 경우도 있다. 이를 검수하지 않고 보낼 경우 받는 분은 상처받는다. 안전사고 위험도 있다. 검수 후에는 하나하나 선물처럼 깨끗하게 포장해 보낸다.
교구재를 많이 개발했는데 아이디어는 어떻게 얻나? 선생님이나 학부모의 피드백을 통해 얻는다. 제품을 보내주면 잘 쓰고 있다며 사진을 보내오는데 가끔 우리가 전혀 예측하지 못한 사진이 온다. 예를 들면 ‘토끼 단어카드에 토끼 모양을 만들어 놓았더니 아이가 색칠을 했더라. 3세 지능을 가진 시각장애아가 색칠 공부를 하면서 단어를 배우고 나뭇잎의 생김새를 알았다’는 피드백도 있었다. 아이가 마음껏 색칠놀이를 할 수 있도록 계속 보내주겠다고 했다. 더 큰 색칠놀이 세트도 만들었다.
기억에 남는 사례가 많겠다. 초등학교 3학년 과정에 윷놀이가 있는데 보조 교구재가 점자로 된 윷놀이 판뿐이었다. 진짜 윷을 던지면 다칠 수 있고 어디로 떨어졌는지도 잘 모르니까 실제 윷놀이를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주사위 각 면에 ‘도-개-걸-윷-모-뒷도’까지 새기고 안에 딸랑이를 넣어 주사위 위치를 찾을 수 있도록 했다. 테스트를 위해 학교로 보내니 선생님이 전맹 아이와 저시력 아이가 신나게 윷놀이하는 영상을 보내줬다. 놀이에서 늘 소외된 전맹 아이가 처음부터 끝까지 본인이 주도해서 윷놀이를 한 것이었다. 처음으로 아이가 놀이의 주체가 돼서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고 교과서 연계 보조 교구재에서 놀이 교구재로 개발 방향을 바꿨다.
피드백을 통해 개발 방향까지 바꿨다는 게 인상적이다. 비시각장애아가 이 교구재로 시각장애아와 함께 놀면서 장애에 대한 인식을 바꿀 수 있으면 좋겠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놀이에 초점을 맞추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시각장애 인식 개선을 위해 우리가 어떤 노력을 해야 할까? 거대한 변화보다는 작은 불편부터 고쳐나가는 게 인식 개선의 시작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편의점에서 음료를 사더라도 어떤 맛을 고를까 신경 쓰지 않나. 시각장애인의 경우 선택의 여지가 없다. 대부분 음료수에 점자가 ‘음료’로만 쓰여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 브랜드가 식혜 음료에 점자로 하트를 표시해서 골라먹을 수 있게 했다. 킥보드·자전거 등이 노란색 시각장애인 유도선을 피해 주차하는 것도 어려운 일이 아니지 않나. 조금만 신경 쓰면 가능한 일이 많다.
담심포의 뜻은 ‘깊고 맑은 포구’다. 화려하지 않아도 들어오는 배들을 안아주는 엄마 품 같은 곳, 그곳을 지켜온 박 대표는 몇 해 전 건강 문제로 큰 파고를 맞았다. 그리고 빠르게 가는 것보다 계속해서 이 사업을 이어나가는 게 더 중요하다는 걸 깨달았다. 개발 목표도 연 다섯 개에서 두 개 정도로 줄였다. 앞으로도 담심포는 느리지만 묵묵히, 시각장애아의 내일을 품어줄 것이다.
고유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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