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97년 10월 12일 고종 황제는 환구단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의식을 행하고, 국호를 ‘대한제국(大韓帝國)’이라 하였다. 삼한(三韓)에서 이어지는 역사를 그대로 계승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하여 ‘대한’이라 하였고, 황제국임을 선포하여 ‘제국’이라 한 것이었다.
우리는 흔히 조선왕조가 1392년 건국되어 1910년 한일합병으로 멸망할 때까지 ‘조선’이라는 국호가 그대로 이어진 것으로 생각하지만, 1897년 10월 국호는 대한제국으로 바뀌었다. 조선이 멸망할 때의 국호는 대한제국이었던 것이다. 대한제국은 13년간 존속한 황제국의 나라로서 강력한 황제권을 바탕으로 고종이 자주적 근대국가를 지향한 나라이기도 했다.
고종 황제 즉위식은 환구단에서 이루어졌다. 10월 12일 고종은 국새를 싣고 환구단으로 가서 천신(天神)과 지신(地神)에게 제사를 올리고 나서 황금색 의자에 앉아 국새를 받았다. 그동안 ‘천세’만을 부르던 신하들은 ‘만세’를 세 번 불렀다. 10월 13일 고종은 명성황후의 빈전에 가서 제사를 올리고 오전 8시경 ‘대한’이라는 국호를 선포하였다. 고종이 황제로 격상됨으로써 왕실의 복식과 호칭에도 변화를 가져왔다. 황제는 황색의 곤룡포를 입었고, 의식을 치를 때 입는 면복(冕服)에는 12가지의 무늬를 넣은 십이장복(十二章服)을 사용하였다.
고종은 황제국에 걸맞게 연호를 ‘광무(光武)’로 정하였다. 대한제국 시기 근대화를 추진한 개혁을 ‘광무개혁’이라고 하는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대한제국은 1899년 8월 교정소라는 특별 입법기구를 통해 대한제국의 헌법인 9개조에 걸친 ‘대한국국제(大韓國國制)’를 발표하였다.
‘대한국국제’에는 황제가 육·해군의 통수권을 비롯하여 입법권과 행정권을 부여하였다. 고종은 강력한 황제권을 바탕으로 근대화의 길로 나아갔다. 황제를 호위하는 시위대와 지방에 진위대를 설치하였으며, 고급 장교 양성을 위해 무관학교를 세웠다. 황제는 대원수 복장으로서 별이 다섯 개 달린 프러시아식 군복을 착용하였다. 1902년 독일인 에케르트로 하여금 애국가를 만들게 하였다. 근대적인 소유권 확립에도 힘을 기울여 근대적 토지증서인 지계(地契)를 국민들에게 발급해 주었다.
대한제국 근대화의 중심에는 고종 황제가 있었다. 황실의 재정을 확대하기 위하여 광산, 홍삼, 철도 수리 사업 등의 이익을 황제 직속의 내장원(內藏院)으로 이관시켰다. 고종은 황실의 재산을 군대 양성과 공장 건립, 외국 도서 수입 등에 사용하였다. 일제의 압력이 심해질 때 고종의 비자금 중 일부는 의병운동의 지원에도 흘러갔고, 1907년 헤이그에 밀사를 파견할 때도 상당수의 비자금을 활용하였다.
고종은 일제의 간섭을 벗어나기 위한 방안으로 미국, 러시아 등으로 외교의 다변화를 꾀하였으며, 특히 서양 문물에 관심을 보였다. 캐딜락 승용차를 타 보기도 했고, 선글라스를 착용하였다. 경운궁 정관헌에서는 외국 사신을 접견하며 커피 한 잔의 여유를 나누었다.
대한제국은 짧은 기간 안에 국방, 외교, 교육, 산업, 기술 분야에서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두면서 자주적인 근대화의 길로 한걸음씩 나아갔다. 그러나 1905년 러·일전쟁의 승리로 한반도에서 우위를 점한 일본의 침략과 방해는 집요했다. 1905년 을사늑약 체결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은 일제로 넘어갔고, 1907년 6월 고종은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이준, 이상설, 이위종 등의 대표단을 파견하여 을사늑약이 무효임을 알리려 하였다. 그러나 일제는 오히려 이를 빌미로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키고 황태자인 순종을 황제로 즉위시켰다.
고종의 강제 퇴위와 함께 대한제국은 그 힘을 완전히 잃었고, 1910년 8월 29일 한일합병조약이 체결되면서 완전히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우리 역사 속의 마지막 황제국 대한제국. 비록 13년의 짧은 역사였지만, 자주적 근대화를 지향한 고종 황제의 노력만은 기억해 두어야 할 것이다.
글·신병주(건국대 사학과 교수) 2013.12.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