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플라타너스라는 나무 이름은 일반인들에게도 꽤 익숙한 이름입니다. 껍질이 벗겨져 줄기가 얼룩덜룩하고 잎이 넓은 나무를 우리 주변에서 가로수로 흔하게 심고 있는데, 사람들은 이 나무를 흔히 플라타너스라고 부르고 있지요. 그런데 이 이국적인 이름의 정확한 의미를 설명하려면 어쩔 수 없이 딱딱한 이야기를 살짝 해야 할 것 같습니다.
플라타너스는 특정한 한 종류의 나무 이름이 아니라 과학자들이 플라타너스속(屬·Platanus )으로 분류하는 몇 종류의 유사한 나무들을 통틀어 일컫는 말이랍니다. 전 세계적으로 보면 플라타너스 종류는 6~10종(학자들의 견해에 따라 차이가 남)이 있는데, 이 중 한국에서 볼 수 있는 플라타너스는 양버즘나무(P. occidentalis )와 단풍버즘나무(P. X acerifolia)의 2종이 있습니다. 괄호 속 알파벳 표기는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이름으로 이해하시면 됩니다.
플라타너스 종류 중에서 양버즘나무가 국내에서 우리들이 가로수로 흔하게 보는 바로 그 나무랍니다. 양버즘나무라는 이름이 좀 괴상한가요? 플라타너스 중에는 원산지가 서남아시아와 남부 유럽인 버즘나무(P. orientalis )라는 식물이 있는데, 이 버즘나무에 비하여 북미대륙에서 온 유사한 나무를 ‘양버즘나무’라고 구별해서 부르는 것입니다. 버즘나무라는 이름은 껍질이 얼룩덜룩한 것이 마치 피부병인 버짐이 핀 것 같다 하여 맞춤법대로라면 버짐나무라고 써야 할 것을 무슨 사유인지 ‘버즘나무’라는 이름으로 굳어져 버렸습니다.
양버즘나무가 아닌 버즘나무는 국내에서는 제가 열심히 찾아다녔건만 지금껏 찾지 못하고 있다가, 유럽 여행 도중에야 마침내 실물을 만나게 되어 진한 감동을 받은 적이 있답니다.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지도 못할 평범한 나무를 보고 왜 그렇게 감격했느냐고요? 버즘나무에 얽힌 유명한 일화를 떠올렸기 때문이지요.
기원전 480년 페르시아의 위대한 대왕 크세륵세스는 그리스를 정벌하기 위해 대군을 이끌고 서쪽으로 행군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 역사적 사건과 관련하여 고대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투스의 <역사>라는 책속에는 이런 구절이 나오네요.
“크세륵세스왕은 이 길을 따라가다가 한 그루의 플라타너스나무를 보았다. 그는 이 나무에 매혹되어서는 나뭇가지에 금으로 된 장신구를 달아주고 그의 정예보병들(immortals) 중 한 명을 택하여 그 앞에서 나무를 지키도록 명하였다.”
또는 크세륵세스왕이 이 나무의 아름다움에 도취되어 진군을 중단하고 그 밑에서 며칠 동안 뭉그적거리는 바람에 도시연합국가였던 그리스 병력이 한데 집결할 시간적 여유를 주고 말았다고도 합니다. 결국 귀중한 시간을 허비한 것이 빌미가 되어 페르시아군이 그리스 연합군에게 패배하고 말았다고 하는데, 어쨌든 이 전쟁 이후 아테네가 그리스 세력권의 맹주로 등극한 것이 역사적인 사실이지요. 만일 이 일화가 사실이라고 한다면, 단 한 그루의 나무가 유럽의 역사를 바꾼 셈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런데 저는 웅장한 나무 앞에 도취되어 서 있는 고귀한 왕의 모습보다는 홀로 남겨진 채 나무를 지켜야 했던 고독한 전사의 모습을 상상하면서 오히려 가슴이 뭉클해진답니다. 황량한 벌판에 우뚝 솟은 한 그루의 장대한 플라타너스, 그리고 창과 칼을 들고 그 앞을 지키고 선 충직한 페르시아 전사. 그는 전쟁의 승패나 주군의 비극적인 운명에 대해서 알게 되었을까요? 아니면 오늘날까지도 그의 외로운 영혼은 쏟아지는 밤하늘의 별들을 바라보며 말없는 나무 곁에서 하염없이 대왕의 귀환명령을 기다리고 있는 것일까요?
글과 사진·김태영(자연생태연구가·<한국의 나무> 공저자) 2013.12.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