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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6월 공직에서 물러난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은 이화여대에서 석좌교수로 재직중이다. 지난 2월22일 그의 연구실을 찾았을 때 캠퍼스에는 눈이 펑펑 내리고 있었다. 세 평 남짓한 그의 연구실에는 커다란 북한 지도가 벽면 한쪽을 채우고 있었다.
2월22일은 마침 정 전 장관이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민화협) 상임의장직을 맡은 날이기도 하다. 그는 이날 취임사에서 “정부에서 쌓은 남북관계 관련 경험을 민간에 공여하라는 징용장으로 알고 일하겠다”고 말했다고 했다. 30년 가까이 정부에서 일하면서 ‘워크홀릭(일중독자)’이라는 말을 들었는데, 물러난 후에도 집에서 '불평'을 듣게 됐다며 그는 웃었다. 그로서는 여전히 남북관계에서 ‘할 일’이 많이 남은 탓이다.
"통일부에서 물러날 때 직원들로부터 장관 재직 시절의 내 일정표를 선물받았어요. 조찬으로 시작해 1시간 간격으로 사람들을 만나고 밤늦게까지 강연을 쫓아다녔던 바쁜 행적이 빽빽이 적혀 있더군요. 남북회담이 열릴 때면 회담 지휘로 숨돌릴 틈도 없었고, 잠도 못 이룰 정도였어요. 남북 대화에서는 한밤중 힘겨루기가 많거든요."(웃음)
143개 합의 중 절반 이상 재임중 이뤄져
1977년 국토통일원 4급 공무원으로 공직에 발을 들여놓은 정 전 장관은 그 뒤 통일부 장관 재직 때까지 줄기차게 대북업무라는 외길을 걸었다. 그는 통일부 장관으로서도 역대 장관을 통틀어 가장 '화려한' 기록들을 세웠다.
문민정부 시절에는 대통령비서실 통일비서관으로 대북 관련 업무를 맡았고,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에서 연이어 3년6개월간 장관직을 수행하기도 했다. 그는 국민의 정부의 ‘햇볕정책’과 참여정부의 ‘평화번영정책’의 가교 역할을 한 셈이다.
그가 통일부 장관에 임명된 것은 국민의 정부 후반기인 2002년 1월. 그해 10월 북핵문제가 불거져 남북관계가 갑작스럽게 어려워진 시기였다. 그는 한 언론 인터뷰에서 당시 상황을 미국의 대북 강경책, 북한의 남한에 대한 높아진 기대감, 국내의 안보불안 심리 등 '삼면 애로’(三面隘路)에 처한 시기라고 표현한 적이 있다.
하지만 그의 재임기간은 남북 접촉이 가장 활발했던 시기이기도 하다. 이 기간에 남북대화는 95차례나 이어졌다. 이는 1971년 이래 전체 남북대화 중 5분의 1에 육박하는 수치다. 같은 기간 남북 간에 체결된 143개 합의 가운데 73개가 그의 장관 재임기간에 이뤄졌다. 2003년에는 무려 106일 동안 남북회담이 계속되기도 했다. 회담 준비부터 결산까지 합친다면 1년 내내 남북회담에 매달린 셈이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남북 철도 연결 사업입니다. 2000년 남북정상회담 이후 철도 연결 사업이 시작됐지만 별다른 진전이 없었어요. 우리는 도라산역 철조망 앞까지 공사를 끝냈는데, 북측은 아예 공사를 중단해 버렸거든요. 이대로 가다가는 철도 연결이 아예 무산될 수 있겠다 싶어 장관 취임 후 곧바로 여론주도층과 기업인들을 만나 북한에 장비와 자재를 보내서라도 철도를 연결해야 한다고 설득했습니다.”
그가 발품을 판 것이 주효했던지 2002년 9월 경의선 및 동해선 철도·도로 연결 재착공식이 치러졌고, 마침내 지난해 10월 경의선과 동해선 개통식을 가졌다. 철도를 통한 남북 왕래가 이뤄진 것은 아니지만, 50여 년간 끊어졌던 남북 대동맥이 봉합된 것이다. 그는 이에 대해 “철도 연결의 당위성에서는 이미 국민적 합의가 이뤄져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회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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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간 회담 실무 통해 北 협상 스타일 연구
정 전 장관은 그동안 다섯 차례 평양을 다녀왔다고 한다. 이 가운데 네 번의 회담에 참여했다. 14차까지 진행된 장관급회담 중 7∼14차 회담에 수석대표로 참가했다. 그만큼 친분을 쌓은 북측 인사들도 많다. 그는 전금진 조선아시아태평양위원회 부위원장과의 인연을 소개했다. 1995년 남북 쌀 협상과 1998년 비료 지원 협상 때 회담 참가자로 만나 신뢰를 쌓았다. 하지만 가장 많이 만난 북측 인사는 김령성 전 내각 책임참사를 꼽았다. 남북장관급회담의 북측 수석대표인 그는 정 전 장관의 회담 파트너였다.
정 전 장관은 20여 년 동안 남북회담에 관계하면서 북한의 협상 스타일을 분석했다. 북한의 협상전략에 관한 한 실무와 이론에서 자타가 공인하는 최고 전문가인 셈이다. 그는 “북측 인사들의 경우 단어 하나하나에 향후 행동 방향이 암시된 경우가 많다”고 전한다. 그래서 협상중에는 겉으로 드러난 몇 마디의 말보다 그 밑에 담긴 의도를 알아채야 하는 경우가 더 많다고 한다. 이는 그가 남북대화에서 ‘육감’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북한 측의 협상 태도는 과거 회담 초기에 비하면 상당히 합리적으로 바뀌었어요. 과거 회담에서는 시작하자마자 체제 선전과 정치공세로 나왔죠. 체육회담이든, 경제회담이든 차이가 없었어요. 게다가 회담 때마다 위협 전술과 벼랑끝 전술을 구사하는데, 이러한 강경한 태도는 기싸움에서 지지 않으려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지원을 더 많이 받아내는 것이 당면목표가 되면서 협상 스타일이 점차 실용적으로 변한 것입니다.”
남북회담장에서 기싸움이 한창일 때는 서로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으려고 ‘오래 버티기’ 경쟁을 하기도 했다. 먼저 일어섰다가는 회담 결렬의 책임을 떠안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오래 버티기는 회담 참여자들의 불문율인 동시에 자신들의 입장이 결연함을 보여주는 전술이기도 하다. 지금도 이런 태도가 모두 없어지지는 않았지만 “오늘은 그만 하자”는 식으로 동시에 일어서는 경우가 많다.
그가 기억하는 북한 측과의 최장 대화 기록은 2003년 7월 서울에서 열린 11차 남북장관급회담. 북핵문제 해결을 위한 6자회담을 앞두고 그는 북측 수석대표와 단독으로 만나 3시간20분을 설득했다고 한다. 북한이 다자회담에 왜 나와야 하는지, 나오지 않으면 어떤 불리한 상황으로 가게 될지 설득한 것이다. 이러한 설득이 주효했는지, 북한은 한 달 뒤 베이징에서 열린 1차 6자회담에 참가했다.
북측과 협상 테이블에 앉으려면 우선 필요한 것이 체력이다. 회담이 며칠 동안 지속되는 것이 다반사이기 때문. 평양회담 때 서울 사무실에서 상황을 빠짐없이 점검하는 것도 체력이 부족하면 쉬운 일이 아니다. 한때 그의 인사 프로필에는 ‘두주불사에 골초’라는 표현이 약방의 감초처럼 붙어 있었지만, 그는 10년 전 담배를 끊고 5년 전에는 채식주의를 선언했다. 오는 5월이면 환갑을 맞는 그는 건강 비결에 대해 “채식과 함께 물을 많이 먹는 것”이라고 말한다. “몸을 가볍게 했기 때문에 그동안 격무를 버텨낼 수 있었다”는 것이다.
협상에서 그의 또 다른 무기는 10년여 대학 강단에서 갈고 닦은 ‘입심’이다. 지난해 이화여대 대학원에서 ‘남북교류의 이론과 실제’를 강의했던 그는 올해 ‘남북한 통일정책’을 강의한다. ‘모택동 사상과 중국의 대외관계’로 학위논문을 쓴 국제정치학자로서 그는 강의에서 “국제관계를 어떻게 내 나라와 민족의 입장에서 풀어갈 것인가”라는 관점을 강조한다. 남북협상에서 산전수전 다 겪은 실무자 강의치고는 부담스러운(?) 내용이 많을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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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은 북한에 퇴로 열어줘야”
그는 대학 강의뿐 아니라 1주일에 한두 번은 외부 초청강연에도 나선다. 지난 연말에는 미국 로스앤젤레스·댈러스 등지를 돌면서 남북관계에 대해 교포들에게 강의했고, 민단 초청으로 일본에 다녀오기도 했다. 공직자 신분에서 벗어난 자신의 남은 역할은 ‘남남 갈등’ 해소라고 생각한다. 남남 갈등은 2000년 남북정상회담 이후 남북관계의 패러다임이 바뀌면서 형성됐다. 이는 또 대북관계에 관한 국민적 합의를 가로막는 장애 요인이기도 하다.
“남남 갈등의 뿌리는 냉전적 사고, 대미 의존적 사고라는 두 가지 연원에 있습니다. 일부에서는 정부가 추진하는 대북화해정책이 한·미관계를 악화시킨다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이런 편견은 남북관계에 관한 정보 부족에서 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정부가 추진하는 대북 화해협력 정책은 국가와 민족의 미래를 위해 바람직한 방향입니다. 이런 점을 국민에게 이해시키고 설득하는 것이 제 몫이라고 봅니다.”
그는 북핵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미국의 양보가 필요다고 지적한다.
"우리는 북핵문제의 당사자이기 때문에 북한을 설득할 책임이 있습니다. 동시에 미국에 대북관계에서의 ‘전략적 유연성’을 주문해야 합니다. 북한을 회담장으로 유도할 수 있는 유연성을 보여달라는 것이죠. 나쁜 짓을 했다고 코너로 몰아붙이면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북한에도 퇴로를 열어 줘야 합니다. 그래야만 미국이 명실상부한 수퍼 파워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미국에 이런 주문을 하면 한·미 간에 정책 균열이 생기는 것처럼 보는데, 그것은 올바른 자세가 아닙니다. 북한과 미국을 동시에 설득해야 합니다.”
하지만 북핵문제는 더욱 혼미해졌고, 남북 대화는 지난해 하반기부터 중단됐다. 그는 이런 와중에 민화협의 역할이 더욱 중요하다고 여긴다.
“당국 차원의 대화가 막혀 있으니 민간 차원에서 쉽지는 않지만 남북 대화의 돌파구를 마련하기 위한 여건 조성에 나서야 합니다.”
하지만 민화협은 보수에서 진보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이념적 스펙트럼을 가진 시민단체와 정당이 참여하고 있다. 여기에도 의견 통합의 과제가 남아 있다. 이래저래 그는 공직에서 물러나서도 여전히 ‘남북교류’의 전령사로 뛰고 있다. [RIGHT]김재환 기자[/RIGHT]